.. 북 스캔 하시는 분들에게 HC-500은 꽤나 많은 보급률을 자랑하는데요. 써보신 분들 아시겠지만 HC-500의 날은 일명 오른손잡이 날 모양이고, 그에 따라서 재단시에 한쪽으로 밀려나면서 잘리는 단면이 일정하지 않게 되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개조가 필요한데요, 결론만 미리 보여드리면 아래와 같은 퀄리티가 가능합니다.
.. 꽤 일정하게 잘 잘렸죠? 개조 방법은 아래 방법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 준비물은 다이소 등지에 파는 커팅매트(A4), 스프레이 본드. 이 두가지면 됩니다. 저는 커팅매트 두 개를 이용해서 만들었지만 하나를 잘라서 쓰셔도 무방합니다. 요는 커팅매트를 위아래로 대 줘서 책이 더 꽈아아아아악 잡히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요. 원래 HC-500에도 스펀지 비스무리한 고무가 있어서 잘 잡아주지만, 쓰다보면 움푹 패여서 잡아주는 역할을 못합니다. 그걸 커팅매트로 커버하는 겁니다. 그리고 밑에도 깔아준 이유는 밑이 쇠판이라 잘 미끄러지는데, 그 것도 커팅매트로 잡아주는 거죠. 이러면 날이 들어와도 책이 밀리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싹둑. 예쁘게 잘리게 됩니다.
.. 개조는 매우 간단하니까 준비물만 구하셔도 바로 해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진짜로 그 전에 왜 고생했는지 알 수가 없어집니다...
.. 그리고, 날이 좀 나가셨다 하시는 분들. 은근 날이 비싸서 새로 마련하는 것도 부담스럽습니다. 근데 문젠제는 이 날이 나름 특수강이라서 아무 거나로는 날이 안갈립니다. 특히 동네에 찾아오는 칼갈이 이런데서 가신다고 뭐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해결책은 특수연마 해주는 곳에 맡기는 거죠. 저는 궁금해서 직접 찾아가서 갈아봤는데, 정말 순식간에 갈아주긴 합니다...만 찾아가기도 힘들고, 칼 들고 왔다갔다도 힘들고. 사장님께 혼났어요. 칼 들고 다니지 말라고.
.. 아, 제가 갔던 곳은 을지특수연마사라는 곳입니다. 거기 말고도 특수강 연마해주시는 곳이 계시면 벼별 무문제 없을 거에요. 가격은 5천원이었습니다. 택배로도 맡아주시는 왕복 택배비 부담하셔도 1만원 조금 넘을 거에요. 연마 이후에는 정말 잘 잘립니다. 걱정 마시고 ㄱㄱ
.. 더 궁금한게 있으시면 댓글 주세요~
.. Words of Yu-Tak Kim, the elemental of the wind.
.. 10대를 코에이 게임과 함께 커온 나로서는 놓칠 수 없는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되어 번역을 올린다. 사실상 무단 전재지만 뭐 무료공개도 되어 있고 해서 그냥 올림. 만약 문제 될 시에는 내릴 수 있음.
.. 원문은 http://news.denfaminicogamer.jp/projectbook/koei 에 있다. 양이 꽤 되는데다 일본어 실력도 떨어져서 거의 직역에 가까우니, 원문을 읽을 수 있으신 분들은 원문을 직접 읽는 것을 추천. 오역이 있을 수도 있고, 편집 과정에서 꼬였을지도 모른다(번역 다 해놓고 편집한다고 3시간 정도 쓴 건 대체……)
노부나가로부터 여성용게임까지… 시부사와 코우와 그 아내가 말하는 코에이 입지전 '세계 최초뿐이잖아 하고 혼났다(웃음)'
2016년 3월 22일
일본의 코에이 테크모 게임스(당시 코에이光栄)가 첫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카와나카지마의 합전(川中島の合戦)』을 발매한 것은 언제일까?
――정답은 1981년이다.
그 때에는 아직 PC로 게임을 하는 문화 자체가 상당히 마이너한 즐거움이었다. 유명한 PC판『문명』이 발매된 것조차 한참 뒤의 일이다. 하지만 그 게임은 방적업을 경영하던 코에이라는 회사가 크게 업태를 바꿔 갈 전환점이 될 정도의 화제를 일본에서 획득했다.
그 2년 후, 그들은 『노부나가의 야망』이라는 대인기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을 낳게 된다. 코에이 테크모 홀딩스 사장 에리카와 요이치(襟川陽一)씨 다른 이름으로 시부사와 코우는 그것을 RPG나 시바 료타로의 소설을 힌트로 만들었다 한다. 우리들이 즐겨 온 『노부나가의 야망(信長の野望)』등의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은 실제로는 컴퓨터 게임사에 갑자기 등장한 게임에 가깝다.
『패미컴 통신』1988년 5월 20일 발매호 085페이지
그 후에도 코에이는 「세계 최초」의 게임을 계속 만들어 왔다. 그 라인업은 폭넓게, 투자 게임에 경영 게임에 에로게의 원조까지 있다. 그 안에도 코에이가 「여성향 게임」이라는 쟝르를 개척한 것은 예전부터 유명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그것이 코에이 테크모 홀딩스 회장을 맡은 시부사와 코우의 아내 에리카와 케이코씨(襟川恵子)가 가진 여성에 대한 신념 같은 것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일본인의 대다수는――아니 게이머조차도 그 대부분은――코에이가 게임사에 있어서 놀랄 정도로 많은 수의 「세계 최초」를 개척해온 것을 모른채 즐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도 그 수 많은 명작들이 염료가공약품의 도매업을 운영하는 부부가 어느날 퍼스널 컴퓨터를 손에 넣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에피소드 역시 아는 사람의 수는 적을 것이다. 그들은 2인 3각으로 세계에 유례를 볼 수 없는 오리지널 게임을 독자적의 가격설정과 유통 방법으로 세상에 내보내 왔다.
기존의 발상에 붙잡히지 않고 항상 자신들의 머리로 생각해 온 코에이 35년의 궤적을 본방 최초인 에리카와 사장, 회장 부부동석 취재에서 들었다.
※이하의 기사에서는 사명으로서의「코에이(光栄)」이외에서는 게임 브랜드로서의 「코에이(コーエー)」로 표기를 통일합니다.(역주, 한국어로 일일이 표기하기 어려운 일이라 그냥 '코에이'로 통일해 표기합니다)
취재 글/TAITAI, 이나바 호타테(稲葉ほたて) 카메라맨/마스다 유우스케(増田雄介)
――에리카와씨는 평소에도 게임을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에리카와 요이치씨(이하 요이치씨):
지금도 틈이 나면 게임기나 스마트폰으로 계속 게임을 즐기고 있어요. 대부분의 장르는 얼추 하고 있지요. 최근에도 『Bloodborne』(※)에 빠져버린 탓에 시간을 뺐겨서 곤란해 하고 있습니다(웃음).
※『Bloodborne』 SCE 저팬 스튜디오와 프롬 소프트웨어에 의한 액션RPG. 취재를 한 때는 2015년에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에서 PS4로 발매한 직후.
에리카와 케이코씨(이하 케이코씨):
매일 반드시 아침 6시부터 출근할 때까지 계속 게임을 하고 있어요. 그것도 다른 회사의 게임을 계속(웃음). 그것도 한 밤중에도, 회식에서 돌아왔나 싶은데 또 잘때까지 반주를 마셔가며 계속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요이치씨:
물론 회사에서는 자사의 게임을 플레이 하여 모든 것을 체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자기 전까지 1시간이라도 있으면 책도 안 읽고 영화도 안보고 게임만 하고 있어요. 이전에는 그럴 때에 TV를 보던 시기도 있었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게임만 하게 되었습니다.
카도카와 회장 사토 타츠오(이하 사토씨):
평소에는 어떤 쟝르의 게임을 플레이 하고 있나요?
요이치씨:
RPG가 많습니다. 저는 일단 엔딩까지 가더라도 곧바로 그 게임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싫어서, 의미도 없이 1개월 정도 계속 플레이 해버리곤 합니다. 『포켓몬』도 『드래곤 퀘스트』도『페르소나』도 매번 매번 무심코 그렇게 해버리거든요.
――「그 기분 잘 알죠!」라는 독자는 많습니다(웃음). 그렇다고는 해도 시부사와 코우가『페르소나』를 플레이 하고 있다는 건 꽤나 의외입니다.『페르소나4』(※)인가요?
※『페르소나4』 2008년에 아틀러스가 발매한 PS2용 게임 소프트. 에리카와씨가 말하는 『페르소나4 더 골든』은 여러 추가 요소 및 변경이 더해져 애니메이션화도 된 2012년 발매한 PS Vita판.
요이치씨:
『여신전생』부터 매우 좋아했는데, 『페르소나4 더 골든』은 엄청났어요.『페르소나4 댄싱 올 나이트』가 나온다는 걸 들었을 때도 바로 사야지하고 생각했어요. 캐릭터가 귀엽죠.
물론 여러 요소를 즐겼지만 특히『커뮤』라는 시스템으로 여성 캐릭터와 연인이 되는 공정은 무척이나 즐거워서 아마도 백시간 이상은 하지 않았나 싶어요. 클리어 했어도 부족해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슬렁슬렁 계속 플레이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노인의 배회 같죠(웃음).
――10대의 아이들에게 있어 지금은 페르소나 시리지는 대인기 컨텐츠인데요……에리카와씨의 나이는 65세죠. 그 연령에서 『페르소나』에 흠뻑 빠져 있다는 건 정말로 감수성이 젊다고 할지……(웃음).
요이치씨:
이야, 모든게 좋아요. 그 오프닝은 제겐 아예 불가능해요(웃음).
(C)ATLUS CO.,LTD. 1996-2008
TV 속에 들어가 싸운다는 아이디어 정말로 대단했지요. 무척이나 팬이라서 2~3개월 정도 전에 있었던 부도칸 라이브(※)에 관계자 티켓을 얻어서 참가해버렸습니다(웃음). 생으로 그 멋진 음악을 들어서 그 날은 정말로 감격했습니다.(요이치씨)
※2015년 2월 5일에 개최된 『PERSONA SUPER LIVE2015 ~in 일본 부도칸 -NIGHT OF THE PHANTOM-』. 『페르소나3』『페르소나4』의 곡을 메인으로 한 공연이 진행되는 도중에『페르소나5』의 최신 프로모션 영상이 공개되는 서프라이즈도 있었다.
사토씨:
에리카와씨가 터무니 없을 정도의 게임 팬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이야기네요.
――아마 서투른 게임 라이터 보다 제대로 플레이 하고 있습니다(웃음). 그렇다고는 해도 에리카와씨의 이런 깊은 게임 사랑 에피소드나 프로그래머로서의 실력에 대한 일화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네요.
케이코씨:
그러고보니 예전에 선거관리 시스템을 만들고 있었어요.
사토씨:
어어 그런 것까지(웃음).
요이치씨:
80년대에는 그런 업무용 소프트도 만들고 있었어요(웃음). 애초에 저희는 게임 전에 재고관리 소프트 등을 개발하는 것부터 시작했으니까요.
――프로그래머로서는 꽤 긴 시간 현역이셨나요?
요이치씨:
게임 회사로서의 코에이는 81년에 『카와나카지마의 합전』(※)이라는 최초의 게임을 만들었던 것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83년에『노부나가의 야망』, 85년에 『삼국지(三國志)』, 88년에 『푸른 늑대와 하얀 사슴(蒼き狼と白き牝鹿)』를 내고 그 후로는 한동안 시리즈 속편을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까지는 기본적으로 제가 스스로 기획을 세우고 메인 프로그래머로서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라고는 해도 현역이었던 것은 거의 플레이 스테이션이 나올 즈음까지로 90년대 중반 경까지입니다. 그 뒤로는 게임이 200명 정도의 사람 수로 이루어진 프로젝트 팀이 분업해가면서 만들게 되어 왔으니까요.
※『카와나카지마의 합전』 1981년에 코에이 마이컴 시스템이 발매한 『시뮬레이션 워 게임 카와나카지마의 합전(シミュレーションウォーゲーム 川中島の合戦)』.『투자 게임(投資ゲーム)』과 동시 개발 되었다.
케이코씨:
그러고보면 수탁 일을 했던 게임에서 기계어가 필요하게 되어서 「우리 사원에게 기계어는 무리」같은 말을 해서 당신이 직접 했던 적이 있지 않았나요.
요이치씨:
아, 그건『닌자군(忍者くん)』(1984・UPL)(※). 그리고 수탁 일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FORMATION Z』(1985・JALECO) (※※) 라는 업무용 게임을 PC게임으로 이식한 일었어요. 이 게임은 대단했는데, 프로그램도 기획서도 자료도 거의 없었습니다(웃음). 일단 어셈블러의 리스트가 있었지만, 프로그램이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뭐가 쓰여져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이건 안되겠네」라고 판단해서 아예 직접 게임을 한창 즐기고 난 다음 "눈 카피"를 해서 어셈블러부터 다시 새로 짰습니다.
※1984년에 UPL이 제작한 아케이드 게임. 빨간 모자를 쓴 1.5등신의 「닌자군」을 조작하고 수리검을 던지는 공격과 점프를 구사하여 적 캐릭터를 쓰러트려 나간다. 코에이는 타 기종판으로의 이식을 담당했다.
※※1984년에 가동을 개시한 쟈레코에 의한 아케이드 게임. 횡 스크롤 형의 슈팅게임으로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전투기가 로봇 형태로 변형 되는 것이 특징.
――엄청난 에피소드잖아요. 마치 스파이크 츈 소프트 회장인 나카무라 코이치(中村光一)씨 같은(웃음).
케이코씨:
당시에 있던 엔지니어의 톱이 「이런 걸 이식할 수 있을리가 없어!」라고 단언 했어요. 그랬더니 지기 싫어하는 이 사람이「절대로 가능해!」같은 말을 꺼내곤 큰 일이 되어 버려서…… 결국엔 철야를 반복해서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했어요. 심지어 그 엔지니어의 업무인 어셈블러를 쓰고 있는데 이 사람은 그에게 하나도 맡기질 않으려 했었습니다.
그 엔지니어도 결국엔 일은 없지, 사장을 일하게 해버렸지, 어쩔 줄을 몰라해 버려서…… 돌아가면 좋을 것을 사내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웃음). 나도 굶은 채로 철야 작업을 하고 있는 에리카와와 그에게 아침이 되면 간식을 차려준곤 했습니다. 우리들이 거의 24시간 영업인 것 처럼 일을 하고 있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그러고보면 지금 생각났는데, 분명 새벽 3시경에 에리카와의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코드에 다리가 걸려버려서 완성직전의 소프트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했던 사건도 몇번인가 있었네요(웃음).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에피소드네요.
사토씨:
이야, 멋진 이야기입니다.
요이치씨:
뭐 저로서는 프로그래밍은 그저 즐거우니까요. 게임도 저도 일생의 친구구요. 기본적으로는 전혀 괴롭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제 경우는 자버리면 머리 속에 들어있는 주소나 서브 루틴의 위치나 내용이 기억에서 사라져버리니까 일어나 있는 동안 한 번에 짜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을 쓰고 있던 시절에는 가능한 한번에 해치우려고 했습니다. 당시는 자는 시간도 엄청 적었습니다.
사업 부진 속에 만난「꿈 같은 상자」
――이 연재는 유명 게임의 탄생비화를 기획서를 보여드리면서 크리에이터에게 이야기를 듣는 시리즈입니다. 단, 오늘은 모처럼이니까 특정의 게임으로 좁히지 않고 코에이의 창업비화를 중심으로 물어보고 싶습니다. 두분이 동시에 인터뷰를 하는 것도 실은 거의 없는 일이죠.
케이코씨:
예, 처음입니다.
――팬에게는 유명한 이야기지만 코에이의 게임 회사로서의 시초가 회장이 PC를 에리카와씨의 생일에 선물해서, 그 때부터 에리카와씨가 게임 개발을 시작했다는 겁니다.
케이코씨:
하지만 그 전에 NEC의 와타나베씨가 만들었던 TK-80이라는 8비트 마이컴의 트레이닝 키트를 에리카와가 사와서 있는 힘껏 만들고 있던 것을 보고 있었어요.
요이치씨:
그래요, PC를 만드는 키트로 8080시리즈의 인스트랙션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30세의 생일에 아내가 MZ-80C(※)를 사줬지요.
※MZ-80C 1979년에 샤프가 발매한 퍼스널 컴퓨터. 데이터 레코더 내장, 그린 모니터 채용 등 기본설계가 같은 MZ-80K에 비해 고가의 부품이 사용되고 있었다.
가장 최초의 것을 제대로 보존하고 계시네요(사토씨)
――단, 그 에피소드에는 거의 나오지 않지만 어째서 부인께서 남편에게 PC를 사 줬을까 하는 겁니다.
케이코씨:
거기엔 코에이 창업의 경위를 말할 필요가 있네요. 애초에 시아버님이 하시던 원래 회사는 염료공업약품의 도매점으로 한 때는 양모지구(※편주: 군마현과 토치기현의 일대)에서 가장 큰 도매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섬유산업이 무너지게된 때에 시아버님은 막대한 빚을 끌어안게 되어 버렸어요.
요이치씨:
마침 동남아시아에서 싼 가격의 섬유제품이 대량 수입되서 일본의 섬유산업이 사양산업의 대명사가 되어가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제가 고향인 아시카가(역주: 足利, 토치기현에 있는 도시)에 돌아가 3개월 뒤에는 아버지로부터 경영의 가르침을 받을 틈도 없이 회사가 도산해 버렸습니다.
케이코씨:
한가지 말씀드리자면 시아버님은 회사가 없어지기 전에 토지를 매각하기도 하고 주위에 되도록 폐를 끼치지 않도록 부채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본인께선 「그건 도산이 아니라 폐업이다」라고 말하곤 하세요. 단지 회사가 "폐업"했어도 에리카와가의 상권은 지속할 수 있었고, 어떻게든 에리카와에게 사업을 지속시키려는 생각이 시아버님껜 있었습니다.
요이치씨:
저 자신도 그 후 1년 정도 남아 있는 일의 정리를 하면서 분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아버지가 계속 할 수 없었던 회사 경영을 내가 해내고 싶다」고 생각해서 코에이를 만들었습니다. 뭐 지금 보면 젊음의 극치라곤 생각하지만요(웃음).
케이코씨:
하지만 전 아시카가에는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웃음). 실은 「아버님의 회사가 도산 안할지도 몰라, 그러면 아시카가에 가지 않아도 돼」라고 생각했더니 사실이 되어서 내심 크게 기뻤습니다. 약간 불성실해 보이는 이야기죠? 에리카와도 지방의 장래를 내다보곤 이 쪽에서의 창업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아버님에겐 어찌됐든 아들에게 가업을 잇게 해서 가문을 재건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저도 아시카가에 가지 않으면 이 뒤에 일생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된 거에요. 시아버님을 위해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하고 저도 아시카가에 갈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런데 에리카와의 양친은 반대로 히요시에 있는 제 맨션으로 이사해 버려선 에리카와도 저도 히요시의 본가에서 PC샵을 열었습니다. 아시카가를 벗어나는 일도 많게 되어서 저는 유아 둘과 밤이 되면 무섭고 쓸쓸함 속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회사를 이으면 좋은데 도산한 에리카와에겐 일은 오지 않잖아요! 뱀이나 쥐나 지네는 왔지만요(웃음).
――뭐 그렇지요…….
케이코씨:
당시는 그 때까지 거래가 있던 회사에 에리카와가 견적을 부탁해도 몇 주나 대답에 시간이 걸렸어요. 자금면의 불안이 남아 있으니까 도산한 회사의 후계자 같은 것과 거래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눈에 보였죠. 일이 안되는 날이 계속됐습니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날 에리카와가 「꿈 같은 상자가 있어」라며 집에 돌아왔어요. 무엇보다 그가 책방에서 발견한 잡지에 실려 있다는 그 상자를 쓰면 몇주나 걸리는 견적의 계산을 스스로 간단하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마이컴이었습니다.
요이치씨:
당시 회사를 만들어 보긴 했는데 제대로 되질 않아서「아아, 역시 나에겐 경영자로서의 재능이 없는걸까」하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책방에 가서는 마츠시타 유키노스케(松下幸之助)씨나 이나모리 카즈오(稲盛和夫)씨 등의 성공한 경영자가 쓴 책을 읽거나 사와서 읽거나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마이컴』이라는 잡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훌훌 넘겨 보니 마이컴을 사용하면 컴퓨터 소프트 교육이 되거나 사내의 OA화로 코스트 다운이 가능해진다고 하는 마치 꿈같은 이야기가 잔뜩 쓰여져 있는 겁니다. 「이거 대단해」라며 저는 바로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그 마이컴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케이코씨:
하지만 가격을 물어봤더니 깜짝 놀라서…….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마이컴은 주변기기를 포함하면 40만엔 이상이었습니다.
단 저는 어릴 때부터 친척에게 받은 용돈을 저금하던 어린이라서 학생시대부터 스스로 일이나 투자도 하고 있었거든요. 저금만은 꽤 해 두었어요. 그래서 그의 생일에 마이컴을 선물했습니다. 그랬더니 에리카와가 금새 빠져들어 버려서…….
요이치씨:
아 뭐 금방 빠져들어버렸습니다(웃음). 바로 베이직이나 기계어를 배워서 재무관리나 재고관리, 또는 견적 소프트를 자작하게 되었습니다.
사토씨:
아직 패키지 소프트 같은 건 팔지 않았던 시대의 이야기네요. 해봐야 Apple II(※)의 VisiCalc가 쓸만하던 정도의.
※Apple II 애플사가 1977년에 발표한 PC. 개인용으로 판매된 PC로서는 최초의 히트작이었다. VisiCals는 표계산 소프트의 선구주자로 Apple II의 킬러 애플리케이션이었다.
요이치씨:
아, 그립네요! 당시 마이컴을 손에 넣은 사람들은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스스로 원하는 걸 프로그래밍해서 만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런저런 걸 하는 사이에 업무용 소프트의 판매가 어쩐지 제 회사를 도와줄 것 같다고 알게 되어서 외주 소프트 회사로서 수탁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케이코씨:
정신을 차려보니 에리카와는「이제부터의 일은 마이컴이다」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어요(웃음). 「그거 당신의 본업이 아니잖아」라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그 후 PC는 일세를 풍비한 거대한 산업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실은 이전에 소프트 뱅크 그룹의 총수 손 마사요시(孫正義)(※)씨의 동생인 겅호 회장 손 타이조(孫泰蔵)씨로부터 아직 소프트의 도매업자였던 시대의 손 마사요시씨와 에리카와 상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뭐든지 두 분이서 에리카와가에서 「장래에는 대성공 해서……」라며 꿈을 이야기 하고 있더니 부인께서 「진짜 남자들은 꿈만 보고!」하며 질렸다고……. 그런 일화를 들어서 「엄청 좋은 이야기잖아」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웃음).
※손 마사요시(孫正義) 소프트 뱅크 그룹의 창업자. 재일2세로서 태어나 16세에 도미. 버클리 대학 졸업 후 일본 소프트 뱅크를 설립했다. 그 후 소프트 도매업이나 출판업부터 통신사업, 야구단 경영 등 폭 넓게 사업을 진행 중. 2014년에는 포브스의 세계 부호 순위에서 총자산 184억달러로 일본 부호 랭킹 1위, 세계 부호 랭킹 42위였다.
요이치씨:
아아, 당시는 그런 일도 있었죠(쓴 웃음) 손씨는 만났던 때가 26살 정도였을까. 지금이야 투자부터 통신까지 여러 분야에 손을 뻗고 있지만 그 시절은 PC 소프트의 디스트리뷰터였습니다. 그래서 매주 일로 손씨와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부터 아이디어맨으로 언제나 재미있었어요.
케이코씨:
하지만 당시의 손쨩은 바보같은 실패를 잔뜩 하고 있었어요. 정말로 여기서는 말할 수 없는 이상한 발명품의 사업 이야기를 가져온다거나 해서 저로선 곤란했으니까요(웃음). 그런데도 「조(兆)가 붙는 일을 하고 싶어」(※)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서 당시의 저는 「조(역주: 여기서는 丁, 일본어에서 두부는 '쵸'라는 단위로 센다. 일본어로는 兆와 丁이 모두 '쵸'로 발음이 같다)가 붙는 일은 두부가게야」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웃음). 그것이 유언실행. 엄청난 노력가였고, 집중력과 재능도 있었습니다. 예전 그는 회사에서 어째선지 구두를 신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양말인 채로 슥슥 융단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사원이 우리에게 와서 손씨에게 전화 하면서 「손씨! 지금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요? 에리카와씨 회사에요」같이 사장에게 반말을 하고 있던 일도 있었습니다. 손쨩도 느긋한 사람이에요. 훌륭하게 상공했어도 「타이조도 나도 머리가 점점 엷어지는 것은 에리카와씨 때문이다」같은 말도 하고 말이죠(웃음).
※ 손 마사요시씨가 소프트 뱅크 창업 첫날에 아르바이트 사원 둘 앞에서 귤 상자 위에 올라가 「30년 뒤에는 두부가게 처럼 1조, 2조라며 돈을 셀 수 있게 된다」라며 연설 했다는 일화. 덧붙여 그 아르바이트 둘은 「이 사람은 머리가 이상하다」며 1주일 뒤에는 퇴직했다고 한다.
――그렇다 쳐도 에리카와 회장은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상당히 금전감각이 날카로우시네요.
케이코씨:
그런가요? 하지만 제가 타마미술대학(多摩美術大学, 역주: 일본의 유명 미대)에 있던 때에 학생운동으로 스트라이크가 있어서 그 시절부터 스스로 일을 해서 돈을 벌거나, 주식투자를 하거나 했습니다. 애초에 코에이의 경영담당자는 저였고, 현재에도 이 회사에서는 자산운용의 책임자입니다. 에리카와가 「마이컴 숍을 열고 싶어」라고 했을 때에도 저는 제가 갖고 있는 토지를 담보로 넣거나, 당시 아직 470엔 이었던 닌텐도의 주식을 매각하기도 해서 개업자금을 마련했습니다. 확실히 닌텐도의 주식이 3,000~4,000주 정도 있었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사토씨:
지금까지 갖고 있었으면 말도 안되는 금액이 되어 있었겠네요(웃음). 하지만 이렇게 들으니 코에이에는 역사 시뮬레이션게임으로 날개를 펴기 전에 실제로는 여러 사업의 가능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에리카와씨는 기계어까지 배워버렸다면 역시 게임을 만드는 것밖엔 없었겠죠(웃음)?
요이치씨:
업무용 소프트를 만드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그것보다도 일이 끝난 뒤에 혼자 게임을 만들어 노는 쪽이 재밌었어요(웃음) 그 안에서도 나로서도 가장 걸작이었던 것이『카와나카지마의 합전』이라는 게임입니다. 뒤에 코에이의 가장 첫 게임이 된 작품입니다.
초기의 패키지는 케이코씨가 그렸다
――이 것도 팬 사이에는 유명한 이야기지만 『카와나카지마의 합전』은 PC 잡지 통신판매로 팔기 시작했죠?
요이치씨:
확실히 게임 소프트의 개발을 시작한 것이 80년이고, 최초로 광고를 낸 것이 『카와나카지마의 합전』을 냈던 81년이었어요.
케이코씨:
단, 광고의 게재료가 높아서 제대로 낼 수 없었습니다. 잡지의 광고라는게 때때로 비어버리는 일이 있어서, 그럴 때에 엄청나게 싼 가격에 게재하려고 여러 잡지에 판만 보내놓고는 「얼마 이하의 가격이라면 이 광고를 실어 주세요」라며 부탁하곤 했습니다.
――……그런 일 보통 하나요?
케이코씨:
안하죠(웃음). 하지만 저는 평소부터 여러 출판사에 전화를 해서 「지금 비어 있는 광고 없나요? 이상하네요」같은 말을 하면서 빈 광고를 발견하면 엄청나게 싼 가격으로 출고했습니다.
사토씨:
그것도 아직 카셋트 테이프의 시대였죠. 분명히 수작업으로 더빙하셨겠네요.
요이치씨:
예, 대단히 원시적인 방법을 써서, NEC의 데이터 레코더라는 테이프 레코더를 20대 정도 늘어놓은 다음 거기에 카세트를 넣으면 칼찰칼착 버튼은 눌러 동시에 녹음했습니다. 그 작업을 파트 타임 분에게 부탁해서 제품을 만들어 왔습니다.
――「가내제 수공업」이네요(웃음). 이 작품의 그래픽도 역시 요이치씨가 만들었나요?
요이치씨:
아, 그건 회장인 에리카와네요.
――어? 회장이 만들었다구요?
케이코씨:
미대를 나왔으니까 그림은 그릴 수 있었으니까요. 단, 프로그래밍을 할 수 없었으니까 그게 큰 일이라서……!
『노부나가의 야망』때에는 메인 화면에 투구를 만들고 싶었는데, 장식인 초승달을 만드는 것에 고생했습니다.
사토씨:
혹시 코에이의 디자인은 계속 부인께서 담당하고 있었나요?
케이코씨:
예, 인쇄물등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당시는 선전광고도 카피라이트도 전부 제가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죠 이 『카와나카지마의 합전』 패키지도 광고대리점 사람에게 영자신문을 사서 그 자리에서 만들었습니다. 마침 포클랜드 분쟁중이어서 그런 기사를 참고하며 만들었습니다.
――……이 패키지가 『카와나카지마의 합전』이라는 타이틀인데 묘하게 그림이 서양풍인 건 그런 이유였군요.
케이코씨:
그 자리에서 산 신문이 마침 포클랜드 분쟁이 게재되어 있었으니까, 시뮬레이션 워 게임이었으니「딱 좋네」하고. 어찌보면 적당히 한거죠(웃음)! 이 코에이 마이컴 시스템의 레터링도 그 자리에서 쓴 겁니다. 빨간 상자 시리즈라고 불리며 잘 팔렸어요.
사토씨:
좋은 콤비였네요(웃음).
케이코씨:
단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게 우리 「마이컴 숍」에 다니던 학생 아르바이트에게 「그 게임 재미 없다는 소리 듣고 있어요」같은 말을 들었어요.「아아, 그런 걸 선전해버렸을까」같이 침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히트였습니다. 카세트 테이프로 했으니까 모두 간단하게 복제 가능해서 히요시의 복제가게는 매뉴얼 카피로 바빴다고 하셨어요. 복제가 없었으면 당사도 매상이익이 더 늘었겠죠(웃음).
『LOGIN』1985년 10월호 20-21페이지
패미컴 참가시의 "대작전"
사토씨:
그 후 코에이는 점점 인기를 얻어서 패미컴에 참가했습니다. 단, 당시의 패미컴은 남코와 같은 아케이드계의 기업이 먼저 와서 PC계의 기업은 늦었죠. 역시 참가에는 시간이 걸렸습니까?
요이치씨:
예, 역시 전혀 구조가 분석되어 있질 않아서 거기에 시간을 뺐겼습니다. PC로 게임을 만든다면 후지츠나 NEC의 기술자 와도 교류가 있었고, 자료도 전부 갖춰져 있었습니다. 당시는 PC-8801 같은 기종의 해설서본도 여럿 책방에 있었고, 마지막에는 OS를 전부 밝혀낸 책이 재판까지 가곤 했을 정도였습니다(웃음). 그에 비해 패미컴은 처음부터 내부를 분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결국 5년 정도 시간이 걸려 버려서 『노부나가의 야망』의 패미컴판은 88년이 되어버렸습니다.
――코에이의 게임이라는 건 그 거대한 카트리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이치씨:
시뮬레이션 게임의 용량은 컴퓨터측의 무장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이게 패미컴의 메모리사이즈에서는 오버 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닌텐도와 함께 메모리를 바꾸어 사용 하는 「뱅크 교환」이라는 수법을 공동개발하여 통상의 2배 크기인 카세트를 특수 주문해서 만들었습니다. 그건 몇번이나 실패해 가면서 고생에 고생을 쌓아가면 만들었던 것이에요.
케이코씨:
그것도 그 규격외의 크기인 카세트는 점두에서 눈에 띄어 버려서 손에 쥐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랬더니 타 메이커에서도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저 커다란 상자를 쓰게 해줘」라고 말해 오셨습니다. 저희들로서는 고마운 것이 당시의 야마우치 사장이 「그건 코에이가 필요해서 만들었을 뿐이다」라며 타사에게는 허가해주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닌텐도에게는 신세를 졌습니다. 매뉴얼도 두껍고 화려하게 만들어 주셨고, 야마우치 사장에게는 비즈니스면으로 여러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사토씨:
코에이는 이미 PC에서 대인기였으니까 닌텐도도 진출에 불안은 없었다고 생각해요.
요이치씨:
저도 없었습니다. 라고 해도 역시 대히트하니 크게 기뻤던 기억이 있습니다.
케이코씨:
사원 분들도 노부나가 팬이 많아서 「드디어 코에이가 왔다」며 크게 기뻐해 주셨습니다. 단, 그 ROM 선불 구조(※) 정말로 큰일이었어요. 억 단위의 현금이 필요해서 역시 당사와 같은 작은 회사가 간단하게 참가할 수 있는 시장은 아니었습니다.
※ROM 선불 구조 소프트를 내장하는 ROM 카트리지를 닌텐도에 생산위탁하는 구조. 최저발주수와 1개당 선불금이 있어, 패미컴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최저라도 수천만엔 단위를 납입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 듣는 독자도 많겠지만 그 제도는 게임팬 보다도 MBA 같은 비즈니스 모델을 배우는 샐러리맨 등에게 알려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반에게는 참가장벽을 올려 조악한 소프트가 많아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말해지네요.
요이치씨:
단 역시 그 금액을 바로 준비하는 것은 PC 소프트 메이커에게는 어려웠습니다. 최초 패미컴의 『노부나가의 야망』은 최종적으로 50만개나 팔린 소프트였지만 그 작품도 돈이 없어서 크게 고생했습니다.
――어, 소프트하우스가 유통업자들을 불렀습니까?
케이코씨:
통상의 소프트 메이커는 큐슈에서 홋카이도까지 도매상을 30사 정도 돌며 주문을 받았다고 하는데 저희들은 게임이 아닌 PC 소프트도 판매하고 있었고, 애초에 당사에는 그런 영업이 없었습니다. 거기에 저는 「그렇다면 유통회사를 불러들이자」라며 습자의 달인에게 화지로 초대장을 부탁하고, 제국호텔에서 「『노부나가의 야망』 패미컴 참가 발표회를 연다」며 일본 중의 도매업자들에게 안내해서 오찬회를 열었습니다.
케이코씨:
예, 어차피 영업은 한명밖에 없었고, PC의 비즈니스나 매일의 업무도 있었으니까 큐슈에서 홋카이도까지 돌아다니는 건 현실적이지 않았으니까요. 큰 업자들에게 총대리점이 되어 달라는 것도 원치 않았구요. 그런데 그랬더니 초대한 전원이 호텔에 와 주셨습니다. 라는 것도 도매의 수익률 시세를 학생시대부터 비즈니스 경험으로 알고 있어서 저는 타사보다 높게 했었습니다.
사토씨:
게다가 코에이의 게임은 정가가 높으니까.
케이코씨:
그렇습니다. 그렇게 부른 위에, 오찬회의 석상에서 저는 「코에이의 게임은 전부 현금으로 부탁드립니다」라고 했어요.
사토씨:
어어어(웃음).
케이코씨:
그랬더니 그 자리에 있던 분들이 화를, 화를 내는 거에요. 「코에이는 우리보다 신용조사가 나쁘다. 우리를 은행으로 생각하는 건가」라며 화를 내시고.
――저……유통업자가 현금선불로 소프트를 구입한다는 건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긴데요.
케이코씨:
비상식인 것도 정도가 있죠(웃음)? 하지만 돈이 없으면 게임을 팔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먼저 돈을 전부 줘"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것도 선불로 냈는데 코에이가 쓰러지면 어떻게 할꺼냐!」라며 화를 냈습니다.
――그렇겠죠…….
사토씨:
그래서 어떻게 되셨나요?
케이코씨:
「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저희들은 자금이 없어서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코에이는 쓰러지지 않을거라 생각하시고, 그래도 『노부나가의 야망』을 넣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부디 선불로 부탁드립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은 「돈에 미쳤구만!」라며 엄청나게 화를 내셨죠(웃음)
사토씨:
(웃음)
――과연(웃음).
케이코씨:
거기서 저는 「코에이에 장래성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 2, 3사가 계셔서 만날 수 있으면 그걸로 다행입니다」라며 더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 후 닌텐도에는 유통업자 분들로부터「일을 모르는 여자가 머리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라던가 「비상식의 극치」같은 많은 클레임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전대미문이었으니까, 분명 큐슈에서 홋카이도까지 저에게 악담이 날아왔겠죠. 저 역시 한동안은 침울해져 있었지만 에리카와가 와선「뭐 기업에는 사람 각자가 역할이 있으니까」라며 자신은 시원한 표정으로 게임을 만들고 있었다구요!
케이코씨:
그러고는 조금 지났더니 은행에 큰 돈이 팍팍 들어왔습니다(웃음). 메인 뱅크였던 지점장이 깜짝 놀라서 뛰어 오셨어요. 은행에 그런 입금이 있을 거란게 알려지질 않아서 「이런 건 처음이다」라며 놀라셨습니다. 뭐 그 돈은 곧바로 닌텐도에게 지불해 버렸지만요.
――패미컴에 있어서 ROM 선불제도는 이제 와서는 유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만, 그 때에 메이커가 도매상에게 선불을 요구했단 사례가 있었다니 처음 들었습니다…….
케이코씨:
최초에는 전액 선불. 다음 부터는 반액선불이었습니다. 금리도 꽤 높았으니까 엄청난 구조였어요. 저는 시아버님의 회사에서 어음 부도에 질려있었으니까 언제나 생글생글 현금결제입니다.
일동:
(웃음)
사토씨:
이야 지금이니까 말할 수 있다고 해야 하나, 그야말로 「내 길을 간다」네요(웃음).
케이코씨:
그 시절부터 언제 코에이에서 안 좋은 일은 전부 제 일이었습니다 후후후(웃음). 하지만 어떻게든 추태를 부리지 않으며 해왔습니다.
단, 그 때에는 젊었으니까 "두려움을 모른다"였습니다. 『노부나가의 야망』의 생산이 결정되고 닌텐도의 임원 분이 회사안의 어딜 걷고 있어도 『노부나가의 야망』의 「단다다단」하는 테마 뮤직의 소리만 들린다고 말해주셨는데, 어느 날 천하의 야마우치 사장과 컨셉으로 부딪혀서 크게 싸우게 되어버렸습니다. 닌텐도의 임원 분이 「우리 사장이 그렇게 부탁하는데 에리카와님이 말을 듣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려선……. 하지만 그 뒤에 게임 메이커 대상으로 열린 설명회에서 많은 분들 앞에서 야마우치 사장이「당신이 옳았다. 내가 틀렸다」고 말해주셨습니다. 그 후, 어느 분의 결혼식에서 에리카와의 옆에 앉은 사장이 「자네 어째서 그런 부인을 얻었나. 빨리 헤어져」라며 웃으면서 이야기 했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그걸 듣고는 엄청 웃어버렸습니다(웃음)
※야마우치 히로시(山内 溥) 닌텐도 전 대표이사 사장. 패미컴 등의 성공으로 완구 메이커인 닌텐도를 세계적인 게임 메이커로 키웠다. 그 시기는 아직 사장일 때였다.
코에이 가격은 왜 높을까?
――그런데……그 코에이의 1만엔을 넘는 가격설정도 부인이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케이코씨:
확실히 이전은 가격이 높다고 들어왔습니다만, 워드 프로세서의 소프트가 10만엔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것도 게임 소프트는 스토리에 사운드, 그래픽이 있고, 인터랙티브 디자인에 프로그래밍도 있다. 당사는 워프로 소프트도 만들고 있었습니다만, 당사의 게임 소프트는 이과와 문과의 융합으로 그것보다 훨씬 어려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단 『삼국지』 때에 1만 4800엔으로 했을 때는 「1만엔을 넘어 나그는데 아무도 안 사……」라며 사원, 유통, 숍의 전원에게 반대를 받았지만요(웃음).
요이치씨:
저 역시도 반대했습니다(웃음). 오락 소프트가 그 가격이면 어떡하냐고 생각해버렸거든요.
케이코씨:
당시는 에리카와와의 이혼도 불사할 각오로 14,800엔으로 간다며 혼자서 전원과 싸웠습니다. 많은 남자가 여자의 가는 팔을 누구 한 명도 응원해 주지 않는 거에요. 하지만 저는 「반드시 이 가격으로 대히트 할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의 게임을 팔기 위해서는 「이혼도 불사한다」(웃음).
케이코씨:
『삼국지』는 10만엔인 워프로 소프트보다도 가치가 있어서, 누구도 만들 수 없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실제로 여러분들께서 많이 사주셔서 유통, 숍 분들도 크게 기뻐해 주셨습니다.
――회장의 그 바이탈리티는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대체 어디에서 그런 파원가 나오는 걸까요?
케이코씨:
저는 학생시절부터 비즈니스를 하고 있었으니까 유통의 구조나 도매가격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의 게임 메이커는 정가의 20% 이하로 소프트를 도매로 넘기곤 했습니다. 학생이 1~2주 정도 개발하면 만들 수 있는 게임도 있고, 그것도 팔리는 시대였으니까 당시에는 그래도 해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로 선전, 광고, 또는 설비투자에 인건비나 경비 등을 고려한다면 역시 그래서는 비즈니스로서는 길게 가질 못합니다. 그러니까 유통 분들도 자주 무너지곤 했지만, 저는 제대로 설명하고, 결코 상태들 배신하지 않는 방법으로 신뢰관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그런 유통, 숍의 분들이나 유저의 여러분들이 최종적으로 기뻐해 주시는 것이 제 바이탈리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마 어느 유통업자 분께 「야쿠자라면 경찰이 있지만 당신에겐 이길 도리가 없다」라는 말도 들었지만요……(웃음).
사토씨:
하하하. 하지만 당시는 코에이 자신도 PC용의 투자 게임을 만들고 있었지요?
케이코씨:
그건 제가 주식투자를 18세부터 하고 있어서 에리카와에게 부탁해서 만든 겁니다. 지금도 코에이에서 저는 투자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투자 게임은 뉴스로서 국제정사나 환율시세도 넣었습니다. 재밌고 실천적이도 해서 팔렸습니다. 아, 그래요 그건 분면 최초에는 정가가 3800엔이던걸 도중에 5800엔으로 바꿨습니다.
――어어어? 괜찮나요(웃음)?
케이코씨:
그 때에도 에리카와는「그런 비상식적인 이야기가 어딨어」라며 크게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3,800엔인데 바로 버그로 멈춰버리는 게임도 있어서, 투자 게임은 실용적이고 재밌고 공부가 되니까 가격을 5,800엔으로 바꿨습니다. 에리카와는 마지막까지 화를 냈지만요. 하지만 그랬더니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웬 걸, 바로 주문이 몰려들어서 이전보다 훨씬 더 팔리게 되었습니다.
――어째서죠…….
케이코씨:
이유는 「그 날부터 유통분들은 재고를 2000엔 비싸게 팔 수 있으니까」입니다. 그 만큼 이익이고, 가게도 점두 재고의 가치를 2000엔 높게 한 것이 전부 이익이 됩니다. 이 5,800엔은 이익폭이 커서 숍은 「손님에게 좋은 게임이다」며 점점 권해서 팔아 주셨습니다. 게임의 평판도 좋아서 여러분들이 기뻐해 주실거라고는 읽고 있었는데, 역시 거기까지 부차적인 효과는 읽지 못했습니다(웃음).
일동:
(웃음)
『노부나가의 야망』 발매후는 게임 플레이의 내용을 기록한 「리플레이 집」도 인기였다.
시부사와 코우의 제작술
――대단히 귀중한 창업시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만, 슬슬 코에이라는 회사의 게임사적 위치에 대해 물어보고 싶습니다. 실은 코에이가 만든 게임에는 세계 최초로 손을 댄 시스템의 작품 많이 있잖아요.
케이코씨:
네. 저 자신이 언제나 광고에 쓸 때「세계 최초!」라며 쓰고 있으니까요(웃음). 어느날 유저로부터 「코에이는 매번 매번 "세계최초"의 카피를 쓰는 건 이제 좀 그만 두면 어때」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매니지먼트의 게임도 여성향 게임도, 실제로 당시에는 유례가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라는 것보다도 애초에 컴퓨터를 사용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이 정도 경영요소를 제대로 넣은 게임 자체가 코에이가 선구자 아닌가요? 시드 마이어의 『문명』(※)도, 1983년 발매인 『노부나가의 야망』보다 꽤 뒤에 만들어진 작품이구요.
※『문명』 1982년에 아발론 힐이 보드게임으로 발표하여 시드 마이어에 의해 1991년에 PC판이 발된 턴제 전략 게임. 문명의 발전을 테마로 하여 국토의 정비나 과학기술의 개발, 상업, 내정, 타국과의 외교 등 다양한 전략을 즐길 수 있다.
사토씨:
……그렇구나!
케이코씨:
어느 게임 메이커의 창업자 분이「오리지날 같은 건 없어요. 어차피 어딘가의 모두가 흉내내고 있으니까」라는 말을 해서 분했습니다.
――하지만 그럼 『노부나가의 야망』같은 게임이 갑자기 등장했는지가 이상합니다. 물론 마니악한 보드 게임 세계에 전략 시뮬레이션은 이미 있었지만, 코에이의 게임은 더 폭넓게 게임을 즐기는 층에게 받아들여질 물건이잖아요.
요이치씨:
최초의 『카와나카지마의 합전』은 정말로 카와나카지마에서 타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켄신이 각각의 부대를 이끌고 싸우는 작품이었습니다만, 그건 이미지로서는 「군인 장기」(※)에 가깝습니다. 애초에 어린이 시절부터 저는 군인장기나 바둑이나 게임을 엄청 좋아했어요. 『노부나가의 야망』에서 헥스 칸을 채용한 것도, 그 경위에서「헥스는 옆에 닿아있는 칸의 접촉수가 가장 많으니까 재밌게 될 거야」라는 감각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군인장기 군대의 계급이나 병종을 갖는 말을 다룬다. 말을 반상의 진지에 늘어세워 상대와 번갈아서 움직여 가지만, 서로 말이 알 수 없도록 뒤집어가며 배치하는 것이 특징. 상대의 총사령부를 점령하거나 상대가 움직일 수 있는 말을 전멸시키면 승리.
케이코씨:
학생 시절부터 코타츠 판을 뒤집어선, 칸에 주사위의 나올 칸을 계산하며 게임을 만들어선 자주 친구들과 놀고 있었습니다.
사토씨:
원래는 아날로그 게임을 좋아하셨네요.
요이치씨:
딱히 『던전즈&드래곤즈』(※) 같은 게임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것을 좋아하는 친구는 있었어요. 초등학생 시절에는 무장의 카드 게임을 만들어서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나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카드를 만들어선 제대로 된 룰을 정해 두었습니다. 물론 가장 강한 것은 노부나가 지만 실제로 가장 강한 것은 닌자, 하지만 닌자는 아시가루(역주: 일반 농민 보병)에게만은 바로 당해 버린다는 룰도 붙였었죠. 뭐 그런 걸 초등학생 때부터 하고 있었습니다(웃음).
케이코씨:
『던전즈&드래곤즈』의 작자는 에리카와의 미국에서 교수를 하고 있던 친구의 제자로 게임 소프트를 만들지 않을래 하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던전즈&드래곤즈』
세계 최초의 TRPG로, 후세의 RPG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오리지날의 개발자는 게리 가이각스와 데이브 아너슨으로 Tactical Studies Rules사가 1974년에 제작 발매했다.
사토씨:
그렇군요(웃음).
요이치씨:
그런 어린이 시절부터 소질은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어른이 되고나서 게임을 만든 때에 점점 무장이라는 "인간" 그 자체와 전국시대라는 "시대" 그 자체를 그려내고 싶어졌어요. 대체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어떻게 살아 왔을까. 그것을 게임을 통해 그려내면 분명 재밌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사상의 「인물」에 포커스를 맞춘 즐거움을 추구하고 싶어 졌다.
요이치씨:
예. 그 때에 생각한 것이 무장이라는 것은 사회 시스템 중의 한가지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싸움」이란 것은 본래 경제나 군사, 산업과 농업과 같은 여러 사회 시스템이 맞물려 돌아가는 전략에 있어서 하나의 선택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장이라는 개개인도 그런 사회 시스템을 움직이고 있는 한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까지 그려내면 분명 자신이 전국시대에 타임슬립한 기분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뭐 그런 것을 생각한 것은 역시 제가 당시 사장이라는 입장에서 회사를 어떻게 매니지먼트 해나갈까 하고 고민하던 것도 컸겠지요.
――경영자의 시점에서 전국시대를 다시 보면 「싸움」이라는 것은 나라에 있어 "경영"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상각에 다다른 것이군요. 실은 전날 예전의 『컴퓨틱』(※)에서 시뮬레이션 게임의 분류를 하는 페이지에서 발견했는데 거기에 『노부나가의 야망』이 「경영 게임」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컴퓨틱』 KADOKAWA 발행인 PC나 게임 등을 취급하던 미디어믹스 잡지. 본 기사에서 질문자를 담당하는 카도카와 회장인 사토 타츠오씨가 1983년 11월에 창간했다.
요이치씨:
예, 그렇게 되겠죠. 『노부나가의 야망』은 실제로는 나를 경영하는 「매니지먼트 게임」입니다. 그럴 것이 「민충」이 오르지 않으면 「생산성」도 「석고」도 오르지 않아서 싸움에 이길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실제로는 나라의 경영관리 수완이 큰 중점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그 무장의 이미지들의 영향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요?
요이치씨:
역시 일본의 작가가 쓴 시대소설입니다. 아무튼 어린 시절부터 시대소설을 엄청 좋아해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대체로 읽었습니다.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씨의 30여권인 『토쿠가와 이에야수(徳川家康)』도 독파 했습니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씨의 『나라 훔친 이야기(国盗り物語)』도 정말로 좋아하는 책입니다. 여기에는 제가 태어나 자란 곳이 토치기현의 아시카가시라는 아사키가씨가 자란 지역이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유적이 많았던 것도 영향이 있는 기분이 듭니다.
사토씨:
시대 소설은 어떤 부분에 매력을 느끼셨나요?
요이치씨:
그 시대에 타임 슬립해서 종이 위에서 당시의 것을 의사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세계의 사람이 된 기분이 드는 것이 기뻤습니다. 반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다지 읽을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는 『무라카미 해적의 딸(村上海賊の娘)』(※)은 대단했어요. 정말로 타임슬립해서 그 소녀와 함께 있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런 세계라는 것에서부터 저는 평생을 떠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게임에서도 그런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까 단지 싸움만을 그리지는 않을 겁니다.
※『무라카미 해적의 딸』 『노보우의 성(のぼうの城)』의 작자 와다 료에 의한 장편 역사 소설. 제 35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과 제 11회 서점대상을 수상했다.
――『페르소나4』의 세계에 녹아 들고 싶어서 클리어 해도 계속 즐긴다는 이야기와 통하네요. 실제로 코에이의 시뮬레이션 게임이란건 코어의 재미는 이른바 「시뮬레이션 게임 팬」 층이 바라는 것과는 조금 다르잖습니까. 실제로는 좀 더 단순하게 역사상의 무장이 된 기분으로 모험을 할 수 있는 것이 즐거운 점인 것 같습니다.
요이치씨:
이야 그런 평가는 정말로 기쁩니다. 그렇게 말해주시는 것이 제겐 무엇보다 큰 기쁩입니다. 감사합니다.
케이코씨:
그 것이야 말로 전국시대를 의사체험하여 「혹시 내가 대장이라면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라며 머리를 쓰는 것이니까, 복합적인 판단이 붙죠.
――게다가 실제로 이 「된다」는 몰입감이라는 것은 보드 게임의 시뮬레이션 게임에 비해 컴퓨터 게임만의 우위라고 생각합니다.
요이치씨:
예, 역시 컴퓨터는 액션에 대한 리액션을 점점 쌓아 가지 않습니까. 이것이 게임 내에 라이브 감각을 낳고, 결국에는 「자신이 여기에 살고 있다」는 감각을 낳습니다. 이것은 제가 생각하는 컴퓨터 게임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더 한가지 계속 물어봐도 좋을까요? 처음에는『삼국지』였다고 생각합니다만 어째서 무장을 파라미터로 표현하셨나요? 지나치기 쉽지만 이것은 실로 게임 사에 있어서 대단한 발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 발명이야말로 해외의 매크로 시점의 시뮬레이션 게임과 다른 그 무장에 감정이입하면 즐기는 코에이 다운 시뮬레이션 게임이 성립한 조건인 것 같습니다.
요이치씨:
아, 그건 RPG의 영향입니다. 애초에 저희들은 『노부나가의 야망』을 만들기 전에 『드래곤&프린세스』(1982 코에이 마이컴 시스템)이라는 RPG를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에서 최초의 RPG라고 내걸고 발표한 게임입니다. 뭐 RPG 시스템 만이라면 실은 그 조그 ㅁ전에 『지저탐험』(1982 코에이 마이컴 시스템)이라는 게임에서 채용하고 있었지만요. 이 게임을 만들던 때에 개발의 아르바이트가 보드 게임 팬이라서 그가 점심 휴식 때 놀고 있는 것을 봤더니 무언가「카리스마」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이건 뭐야?」라고 물어봤더니 「이건 "인지를 뛰어 넘은 매력"을 나타내는 수치에요」라고 답하더라구요(웃음).
――(웃음)
요이치씨:
그런 「매력」같은 것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것이 무장에 「매력」이라는 파라미터를 도입한 계기입니다.
――지금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전에 카도카와의 카와우에회장이 「『노부나가의 야망』은 내 생각엔 RPG다」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 냈습니다. 분명히 『노부나가의 야망』같은 자신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차례차례로 적을 물리쳐나가며 동료를 늘려가며 세계를 확대시켜 간다는 감각은 되려 RPG에 가깝네요.
사토씨:
뭐 그래도 좋은 컨텐츠라는 것은 영화든 소설이든 그 것이 되어서 몰입 되는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건 쟝르를 뛰어 넘은 것이 아닐까요?
요이치씨:
그렇습니다. 딱 사토씨가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단, 제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생각에선, 어떻게 드렇게 되야만하는 강한 기준이 있는 기분이 듭니다. 제가 생각하는 재미 있는 게임이란 것은――정말로 자신이 거기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 같고, 자신의 하고 싶은 것을 명확한 의사를 갖고 실행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거기다 그에 대해 몬스터나 경합하는 무장이 반응해 주는 가운데 서로 싸워나가면, 자신의 손으로 드라마를 낳아 갈 수 있겠지요. 그런 게임에 자기 자신도 매료되면서 계속 만들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카와우에씨가 말씀하신 「RPG같다」라는 것도 나라 자체가 캐릭터처럼 성장해 가는 이야기니까 확실히 그런 측면이 크게 있습니다. 지금 들어서 처음 깨달았지만요(웃음).
세계 최초의 여성향 게임 『안젤리크』 탄생비화
사토씨:
뒤에 코에이의 "세계 최초"라는 것은 역시 여성향의 「연애 시뮬레이션」은 빼놓을 수 없죠.
케이코씨:
『안젤리크』(※)말이죠. 여성향 게임 자체도 이미 코에이가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 당초부터 계속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안젤리크』 1994년에 슈퍼 패미컴으로 발매 된 세계 최초의 여성향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어! 부인의 발안이었습니까? 어때서 또?
케이코씨:
왜냐면 컴퓨터 게임은 남성시장이잖아요. 싸워서 승리한다. 또는 팡팡 쏴 죽인다.
――코에이 테크모의 회장이 말하니 엄청나게 설득력이 있네요(웃음).
케이코씨:
게다가 게임 잡지를 보면 전쟁이나 액션 슈팅밖에 없습니다. 여성 입장에서 보면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성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이 절대로 이 세상에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두 분이서 경영하고 있던 마이컴 숍에 여성 고객이 오긴 했나요……?
케이코씨:
안 와요! 남자밖에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여성 게임이 퍼질 거라 생각한 건 진짜로 대단하네요.
사토씨:
확실히! 그렇네요.
――하지만 해외에서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소녀게임 같은 여성향 게임이 획립되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죠. 대체 무엇을 근거로 회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신경 쓰입니다만.
케이코씨:
그치만, 인류의 절반은 여성이잖아요? 게임이 남성만의 것일리는 없다. 분명 여자아이가 두근두근 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면 기뻐해 줄 거라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성이 PC에 흥미를 가지는 시대가 올 것도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즉, 무언가 구체적인 데이터가 있던 것이 아니라 회장의 안에 있던 "신념"이랄까 「게임이 남성만의 것일리는 없다」라는 강한 확신이 세계에서도 예를 찾기 힘든 여성향 게임을 낳았다?
케이코씨:
그렇게 말씀하시니 뭔가 대단해 보이지만(웃음) 가설을 실행한 것 뿐입니다. 여성 취향을 담은 걸리한 게임을 만들면 여성들도 게임을 절대로 즐겨 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남성과 여성은 취향이 다릅니다. 남성은 능동적, 여성은 수동적이란 것도 있고, 여자 아이에겐 「흘려버리는 문화」 쪽이 받아들여지기 쉬운 것도 있습니다. 실제로 여성에게는 영화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남성과 같이 조작하거나 자발적으로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어느 쪽이냐면 어려워 하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도 남자 아이들은 알람시계 같은 걸 샅샅이 분해하거나 물건을 던지거나 마구 뛰어다니곤 하지만 여자 아이는 소꿉놀이나 인형 놀이를 즐기는 것이 많잖아요.
단, 당시는 사원이 남성밖에 없었고, 그걸로는 여심을 알 수 없다. 그러니까 나는 여성을 채용했습니다. 그것도 당시의 여성사원은 즉시 결혼하고 퇴직해 버려서……결국 『안젤리크』를 발표하기까지 10년이 걸렸네요.
――10년 걸렸던 겁니까…….
케이코씨:
90년대가 되어 겨우 여성들의 팀을 만들었는데 「루비 파티」라고 이름 붙여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먼저 철저하게 여성에게 맞춰진 게임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수호성은 그리스 신화를 제재로 해서 여성향으로 어쨌든 핑크를 다용하고, 주인공도 걸리한 애로 한다던가 해서 만들어 진 것이 『안젤리크』입니다.
――혹시 부인 자신이 만들어낸 게임은 『안젤리크』가 처음인가요?
케이코씨:
네. 단지, 『안젤리크』의 세계관은 도중에 바꿨습니다. 처음 만드는 여성들의 게임제작은 미숙했습니다. 경쟁 시스템이 만들어 지질 않아서 결국엔 시부사와 코우를 불러서 여왕후보가 둘이고 혹성을 육성하고 수호성에게 도움 받아가며 경쟁하는 게임 부분을 만들었습니다.
요이치씨:
뭐 저에겐 여성들이 기뻐할 달콤한 말은 만들 수 없지만, 게임이라면 만들 수 있으니까요(웃음). 요는 자신이 판타지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그랬더니 그건 남성향으로 만들어 왔던 전국시대의 무장을 그린 시뮬레이션 게임과 같습니다. 그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를 만들어서 거기에 잘 관련성을 만들어 내면 남녀에 상관 없이 점점 그 세계에 살아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거기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단, 꽤나 이 관련성을 잘 만들 수가 없어서 스토리 부분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야말로 『노부나가의 야망』과 『삼국지』에서 쌓아 온 그 세계에 빠져 드는 기분이 드는 「된다」를 낳은 테크닉을 갖고 들어가셨네요. 『안젤리크』는 지금에선 소녀 게임의 선구주자로 전설의 게임이 되어 있습니다만 발매 당시에는 어땠습니까?
케이코씨:
최초에는 시장이 없으니까 당연하게도 판매 부진이었습니다. 게임 잡지도 독자는 남성이어 거의 취급되지 않았고, 반대로 일반 잡지 쪽이 화자게 되었습니다.
사토씨:
어차피 처음이니까……상당히 괴루어셨겠네요.
케이코씨:
게다가 저는 한번에 미디어믹스를 했으니까요. 만화로도 하고, 드라마 CD로도 만들고. 근데 그건 힘들었다고 보다는 정신 없이 빠져들었단 쪽이 옳을 거에요.
――그런 미디어믹스도 『하쿠오쿠키(薄桜鬼)』등의 여성향 게임의 전략을 선구자셨네요.
케이코씨:
그리고 성우의 보컬 CD를 발매했습니다. 그랬더니 6명 있는 캐릭터 성우의 CD가 15,000장~20,000장이라는 숫자로 팔려나갔습니다. 아직 당시는 지금처럼 성우가 노래하던 시대가 아니었으니까 음정을 벗어나거나 리듬에 타지 못하곤 했었습니다. 그래도 모두가 캐릭터에 마음을 담고 있어서 점점 사주셨지요. 당시는 신곡으로 2만장 팔리면 레코드 업계에서는 사장상이었으니까 이건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정말로 좋은 시대였죠(웃음)
토쿄대와 하버드가 주목한 『노부나가의 야망』
――슬슬 시간이 되었는데요. 정말로 오늘은 코에이의 끊이지 않는 도전의 역사를 들려주신 것 같습니다.
케이코씨:
뭐 원래는 게임회사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는 이 「코에이」라는 이름도 엄청 좋았던 것 같아요. 창업한 때에 국회의원도 다니는 저명한 역학자에게 에리카와를 데리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이제부터의 시대는 더 이상 "에리카와 산업"같은 공업이나 산업이라는 이름름을 붙여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시는 거에요. 「이 뒤로 어떤 일로 성공할지 알 수 없는 시대가 된다. 어떤 비즈니스라도 통용될 수 있는 사명으로 하시게」라고. 그리고 「코에이(光栄)」라는 글자는 에리카와에게 어울려서 "고고하게 빛난다"라더군요.
――과연.
그치만 저에겐 그다지 딱 오질 않아서(웃음). 에리카와 쪽도 제가 대학 시절에 네이밍에 대해 배웠단 걸 들어서 사명을 생각해 달라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창업 시에는 이미 업무가 바쁜데다 두 명의 아이를 기르며 자신의 디자인 일도 안은채였습니다. 거기에 당시 살고 있던 조모의 오랜 별장은 스스로 수리해야 했고, 틈새바람이나 부서진 장지문에 고민하고 있었고…… 솔직히 가업인 도매업의 네이밍을 상각할 처지가 안됐어요.
이런 저런 사이에 정신을 차려보니 등기 날이 와서 거기서 「이젠 코에이로도 좋잖아?」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게임 소프트 회사가 될 거라곤 당시에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분의 판단은 대단히 멋졌습니다. 덕분에 해외에서도 코에이라는 이름을 사용해 주고 있으니까요.
사토씨:
뭐랄까 좋은 이야기네요.
――그렇다고 해도 코에이의 게임은 쟝르가 폭넓고 게다가 그건 모방이 아니라 항상 자신들의 머리에서 생각해 온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케이코씨:
그런 의미에서는 일세를 풍미한 『톱 매니지먼트』(※)가 있었죠. 회사 경영의 공부가 되는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만 정치가인 세코 히로시게 선생이 좋아하셨다더군요. NTT에 근무하시던 때에 톱 매니지먼트 덕에 회사의 연수에서 1등이 되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에리카와가 『톱 매니지먼트』를 제작한 것도 절대로 회사를 도산시키지 않겠다며 공부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뭐 그런 걸 말해도 시아버님은「도산 같은 거 한 적 없어. 회사정리다」라며 화내시지만요(웃음).
※『톱 매니지먼트』 1984년에 발매한 PC용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 NEC나 IBM등의 당시 PC 메이커를 흉내낸 회사를 골라 연말상전 등을 싸워 나간다.
요이치씨:
시뮬레이션 게임은 의사체험에 의한 전략이나 전술을 겨루는 타입의 게임인 이상, 별로 역사에 한정 받지 않아도 여러가지 장르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거기에서 특히 90년대 이후는 역사만이 아닌 경영에서도 연애에서도 경마에서도 여러 쟝르에 이 게임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전개해 왔습니다. 그랬더니 대학의 경영학부에서 「매니지먼트 게임」이란 것이 쓰여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경영행위로 BS나 PL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게임을 통해 머리 속에 넣기 위한 학습 게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런 대학의 선생 분을 만나 보니 놀라울 정도로 저와 같은 것을 하고 계셨습니다.
사토씨:
학문의 트렌드에 딱 맞았던 거네요.
요이치씨:
저로 부터는 앞에 말한 것 처럼 『노부나가의 야망』이 애초에 나라를 경영하는 매니지먼트 게임입니다. 그래서 『톱 매니지먼트』를 만들 때도 PC 제작회사를 자신이 경영해서 경합의 NEC나 토시바나 IBM과 싸운다고 하는 이미지로 만들었던 겁니다.
케이코씨:
당시의 관청이 실무적으로 도움이 되는 매니지먼트 게임을 공동제작하려고 대형 가전 메이커 들과 30억엔 정도의 예산을 할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가전 메이커의 사원 분이 「코에이의 『톱 매니지먼트』라는 게임이 재밌고 엄청나게 잘 만들었다」라고 하셨다것 같아요. 그래서 관료 분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에리카와가 관청에 설명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관료 분이 「얼마면 만들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에리카와가 「3,000만엔 정도입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 자리에서 관료분은 아연했다고 하더군요.
일동:
(웃음)
케이코씨:
결국 그 프로젝트인 채로 매니지먼트 게임을 만들었지만 분명 미인 비서도 나오지 않았고(웃음) 재미 없었던 거겠죠.
사토씨:
혹시 에리카와씨가 시뮬레이션&게이밍 학회(※)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은 그런 흐름입니까?
※시뮬레이션&게이밍 학회 시뮬레이션과 게이밍, 그에 관련한 분야의 학제적인 학회(공식 HP로 부터). 1989년에 설립될 때에 에리카와 요이치씨가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요이치씨:
예. 경영 시뮬레이션의 연구자 분들과 토쿄대학의 세키 선생이라는 국제 정치학의 선생의 연줄이었습니다. 세키 선생은 국제정치의 시뮬레이션 전문가로 자신의 연구분야와 당사의 게임이 매우 가까우니까, 한번은 토쿄대에서 말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케이코씨:
처음엔 이 사람이 싫어해서 거절하겠다고 하는 거에요. 하지만 제가 「도움이 되니까」라며 억지로 진행시켰습니다.
요이치씨:
토쿄 대학의 대학원생들을 예전에 어떤 알고리즘으로 게임을 짜는지, 예를 들어 『유신의 폭풍(維新の嵐)』이라는 게임의 경우 어떤 식으로 유신지사들의 파라미터등을 결정해가 등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세키 선생과 친해져서 그 때부터 구미에서는 계속 이전부터 활동하고 있던 국제 시뮬레이션&게이밍 학회의 일본지부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되어서 응원하게 되었습니다.
케이코씨:
그것도 당시 일본학술회의 회장으로 문화훈장도 수여 받은 토쿄대학 명예교수인 콘도 지로 선생이 『노부나가의 야망』의 큰 팬으로 손자에게 유일하게 이기는 게임이라며 플레이하고 계셨어요. 콘도 선생은 어찌된 일인지『노부나가의 야망』이 매니지먼트 게임으로서 뛰어나다는 것을 미국의 뉴 햄프셔에서의 학회에서 발표했습니다. 그랬더니 캐나다의 대학이나 하버드대학의 대학원에서도 『노부나가의 야망』을 학생에게 플레이 시키게 되어 버려서 결국엔 TV에서도 다루어졌습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야 말로 게임」(요이치씨)
――과연. 슬슬 정말로 끝낼 시간입니다만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물어봐도 좋을까요? 시부사와 코우라는 이름을 오랜 시간 에리카와씨가 자신이라고 밝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요이치씨:
2000년까지는 일절 밖에 나오지 않는 개발 프로듀서라는 위치를 정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자신의 이름을 말해 버리면 제가 죽은 뒤에는 끝이겠지만 시부사와 코우라고 이름을 붙여 두면 다른 사람이 이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에 개발의 세계에 다시 한번 뛰어들어야 겠다고 생각한 때에 이미 자신의 이름도 얼굴도 나와 버려서 책임을 갖고 「이것은 제가 만들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쪽이 시대에 맞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덧붙여 이름의 유래는?
요이치씨:
코우는 코에이의 코우입니다(웃음). 시부사와 쪽은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라는 막말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약한 경제인 분에게서 따왔습니다. 그 분의 삶의 방식을 제가 무척이나 좋아해서 그 이름을 썼습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1840년에 태어나 에도시대로부터 타이쇼시대까지 살았다. 삿포로 맥주, 오지 제약, 일본우선, 덧붙여 토쿄 증권 거래소나 이화학연구소 등의 여러 기업의 설립에 관여한 일본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거기도 조금은「된다」요소 였습니까(웃음).
요이치씨:
하하하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의 사고 방식은 「비즈니스라는 것은 그저 이익을 내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위한 사람을 위한 것에 있다」라는 것으로 그의 인생은 마치 그 실천이었습니다. 저는 그 삶의 방식에 무척이나 홀려버렸으니까요. 그래서 당사의 기업이념은 「창조와 공헌」이라는 단어로 했습니다.
――끊임 없는「창조」라는 것이 코에이의 특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도 매번 점점 시스템을 바꾸고 있구요.
요이치씨:
예. 새로운 재미로 고객을 즐겁게 하는 것이 이 코에이 테크모의 방침이니까요. 항상 새로운 요소를 넣습니다. 『노부나가의 야망』에서 매번 대폭 시스템을 바꾸거나 무장을 늘리거나 하는 걸 계속하는 것은 바로 이 기업이념에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역시 최초의 『카와나카지마의 합전』의 인기 이유가 애초에 본 적이 없는 게임이었다는 서프라이즈에 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부나가의 야망』역시 단순한 싸움이 아닌 토탈로 전국시대를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점이 다른 게임과 다른 점이어서 즐거움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안에서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게임이고, 항상 고객에게 새로운 서프라이즈를 만들어 가지 못하면 필요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있습니다.
케이코씨:
예,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진화해 나가려 합니다.(끝)
드물게도 코에이 창업자 에리카와 부부 동석 인터뷰였지만 여러분은 어떤 감상을 갖게 될 것인가. PC가 보급되어 세계 속의 젊은이가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 1980년대. 그 안에서도 코에이가 만든 게임들은 실로 무리를 벗어난 독창적인 것 중 하나였다. 그것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밝히는 것이 이번 인터뷰에 있어 편집부의 또 하나의 테마였다. 취재 중에 보였던 것은 에리카와씨의 뛰어난 프로그래밍 능력도 있지만 여러 시뮬레이션 게임을 항상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게임에 넣어 본 과감한 자세였다. 전혀 다른 분야에서 발전해 온 매니지먼트 게임과도 서로 통하는 게임 디자인에 그가 다다른 것은 그 자세였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닐까. 특히 에리카와씨가 재미있는 것은 「역사상의 위인이 되어보고 싶다」 등의 "어린" 꿈을 소중히 해서 그것을 실현할 것으로 시뮬레이션 게임을 잡은 것에 있다. 실제로 이 취재에서 에리카와씨가 가장 얼굴을 발게 폈던 것은 「코에이 게임의 재미는 되는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였다. 65세가 되는 현재도 『페르소나』를 즐기는 요이치씨의 "영원의 소년"의 일면이 보인 순간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인터뷰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이 시부사와 코우의 아내이자 코에이 테크모 홀딩스 회장인 에리카와 케이오씨의 어쩌면 여러 사람에게는 의외였을 정도의 분투기였다. 그녀도 또 남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강한 신념을 기반으로 코에이의 게임을 판촉해 왔지만, 그 통쾌하게 말하는 여러 일화는 마치 역사소설의 등장인물인 것 같다. 역사상의 인물로 말하자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내인 「네네」, 또는 소설 「공명의 갈림길(功名が辻)」에 등장하는 야마우치 카츠토요의 아내「치요」등 남편을 지지하면서 전국시대를 달려 나간 여성들이 있었듯이 그녀도 또 게임 산업의 역사를 수놓는 주역의 1인이라 할 수 있다. 여하튼 거의 말해진 적이 없던 에리카와 부부의 에피소드로 달아 올랐던 이번 인터뷰. 코에이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을 엿볼 수 있었던 취재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코에이 본사가 요코하마시 히요시에 있던 시절의 인터뷰 기사를 공개!
기사중에서는 『노부나가의 야망』『푸른 늑대와 하연 사슴』『삼국지』의 "코에이 역사 삼부작"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LOGIN』1986년 9월호 160부터 163페이지로 부터).
.. 솔직히 시부사와 코우(에리카와 요이치)의 이야기는 여러번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부인인 케이코의 일화는 그야말로 역사소설급. 사실 번역한 것도 케이코의 이야기가 많아서이다.
.. 즐겁게 읽으시기를.
.. Words of Yu-Tak Kim, the elemental of the wind.
.. 거실에 컴퓨터를 하나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은 몇년 전부터 갖고 있었는데 그간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이번에 뚝딱 만들었다. 대충의 요구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 1. 저전력일 것
.. 2. 무소음일 것(=팬리스)
.. 3. 사이즈가 작을 것(=Mini-ITX)
.. 4. 1080P 10bit AAC 인코딩 된 녀석들이 무리없이 돌아갈 것
.. 5. 에뮬 정도는 문제 없이 돌아갈 것.
.. 위 조건을 만족시키는 녀석들 중에 결국 1037U, J1900, N3150의 보드에 CPU 장찬된 일체형으로 고르기로 했다. 이 중 결국 여러모로 봤을 때 N시리즈가 가장 최근에 나온 녀석 답게 DXVA지원도 그렇고, 저전력도 그렇고, 심지어 가격도 다른 녀석이랑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상황이라서 결국 N3150으로 결정.
.. N3700이 쌀쿡에선 유통되지만 한국에선 유통되지 않아서 N3150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저전력의 경우엔 N3050이 좀 더 낫다지만 큰 차이 없는 녀석이라 N3150으로. 보드는 현재 ASRock과 GIGABYTE 것이 나와 있는데, 끝까지 고민하다가 결국 ASRock으로. 솔리드 캐퍼시티나 노트북램이 아닌 일반 램을 써도 되는 점 등은 GIGABYTE가 더 좋았지만, 약간의 가격과, 거기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든 것도 사실.
.. 램은 보드가 정해져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노트북용 SO-DIMM램으로 선택. 삼성은 싫어해서 실리콘파워 제품으로 결정. 사실 4G만 해도 될 것 같았지만 어차피 얼마나 한다고, 싶은 마음에 2개.
.. 케이스는 별 고민 없이 제일 작아 보이는 녀석으로 결정. 나름 사람들이 많이 구입하는 녀석으로 보이는 다오테크의 Alu-400i USB 3.0을 선택
.. 파워의 경우 무소음 때문에 DCtoDC 파워로 갔고, 이것도 별 선택의 고민 없이 마이리플 DC 120W으로 골랐다. 어댑터의 경우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어차피 60W도 다 쓸 일이 없어서 12V 5A로 결정.
.. 그리고 기존에 쓰던 무선 키보드+마우스 조합이 구려서, 새로 구매하기로 했다. 마소와 로지텍의 터치패트 달린 키보드를 고민하다가 역시 하드웨어의 명가 마소가 좋겠지 싶어서 마소의 올인원 미디어 키보드로 결정.
.. 그래서 나온 최종 조합은 다음과 같다.
.. CPU+M/B: ASRock N3150-ITX 디앤디컴
.. RAM: 실리콘파워 노트북 DDR3L 4G PC-12800 1.35V x2개
.. 케이스: 다오테크 Alu-400i USB 3.0 Mini-ITX
.. 파워: 마이리플 DC 120W D3 (12V 5A 어댑터 포함)
.. 키보드/마우스: Microsoft 올인원 미디어 키보드
.. SSD: 전에 쓰다가 남은 Intel 520 240GB
.. SSD는 재활용 했으니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G마켓에서 주문, 총액은 263,360이 들었다.
.. 입력 디바이스는 이런 조합.
.. XBOX 360 무선 패드와, 360 무선 패드를 개조한 무선 스틱을 연결. 물론 무선 리시버가 필요한데 정품을 지인에게 얻어와서 매우 편하게 연결. 그리고 옆에 보이는 마우스는 예전에 노트북 용으로 쓰던 마소 와이어리스 1000. 이래놓고 보니 순 마소 것 밖에 없네.
.. 동영상 정도만 볼 때는 키보드만 있으면 되고, 약간의 마우스 조작이 더 필요한 PC 게임 쪽에선 마우스를 추가. 패드 지원인 게임은 패드를 추가, 스틱이 있으면 좋은 MAME 사용시에는 스틱을 추가. 같은 조합으로 사용.
.. 실제 사용시 기존에 동영상을 U+의 tvG 셋탑에 diceplayer를 깔고 쓰다가, 불편함이 많았는데, PC 구동으로 해당 불편함이 많이 사라졌다. 역시 다음팟 플레이어가 훨씬 좋다. 이 쪽의 경우 코덱 설정을 할까말까 생각 중이긴 한데 귀찮아서 안할 것 같음. 근데 TV도 컬러 프로파일 잡아줘야 하나? 귀찮긴 한데.
.. 스팀의 경우 저사양 게임은 그냥 설치해서 플레이 하고, 고사양 게임은 PC에 설치 후 스트리밍 플레이가 가능해서 그 부분이 좋다. 실제로 어쌔신크리드 신디게이트를 스트리밍 플레이 해봤는데 아무런 문제없이 원활히 플레이 가능했다. 다만 원래 PC도 혹사하는 건 좀 에러... 굳이 원래 PC에 해당 화면을 뿌려줘야할 이유가 있나 모르겠네.
.. 반대로 윈도10끼리의 게임 스트리밍은 안된다. XBOX ONE 하고는 된다더니... 라이즈 오브 툼레이더도 스트리밍 되면 참 좋을텐데 그 부분은 아쉽.
.. 여튼 전반적으로 매우 편해진 건 사실. 요즘 좀 아쉬운 건, IPTV도 데스크탑에 어떻게 볼 수 있는 세팅을 할 수 없을까? 하는 건데... 과연 방법이 있을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