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몇 번 박물관 다녀왔던 기억은 꽤나 재밌게 남은 편이다. 국립 중앙 박물관이 그러했고, 경주 국립 박물관이 그러했고, 전남 강진의 청자 박물관이 그러했다. 나는 여전히 보는 눈도 없고 한 번 본 거는 금새 다 까먹는 그야말로 '이미지맹'이라 할만한 사람이긴 해도 나름 좋은 작품을 볼 때마다 '아 이건 좀 좋은 것 같다……!'라는 느낌이 무척이나 좋았다. 자질구레한 설명보다도 해당 작품을 볼 때 느끼는 그 감정. 아무래도 그런 것이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박물관을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 그렇지만 미술은 역시 차원이 다른 이야기. 언젠가 제주도 서귀포의 이중섭 박물관에 갔을 때, 나는 이게 대체 뭘 그려놓은 것인지 전혀 감도 오지 않았지만 동행했던 사람은 그림 하나하나를 감탄하면서 보고 있었다. 작가의 심정을 그림에서 읽어내고 있었다. 나중에 해당 그림을 그린 시기나 그 때의 작가 상황, 해설 등을 읽어보니 거의 동행인의 추론과 동일했다. 그 사람이 특별한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는 사실. 그런 점이 미술관에는 발길을 향하지 않게 했다.
.. 근래들어 꽤 재미있게 봤던 웹툰인 '도자기(호연 작)'에 나오는 도자기 중에 간송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것들이 좀 있었다. 어찌어찌 찾아보니 간송미술관에는 도자기는 둘째치고 조선시대 서화가 엄청나게 많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년에 개관도 딱 2시기만 하고, 그 때마다 테마가 달라진다는 것도, 그 시기를 놓치면 볼 수 없다는 사실 등을 줄줄이 알게 되었다.
.. 그림에 대해서는 장님이나 마찬가지인 나라도 어째서인지 간송미술관은 한 번쯤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6월. 봄 전시는 지나갔고 10월에 다시 전시회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달력에 '*간송미술관' 이라고만 적어놨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10월이 되고 달력을 넘기자 저 표시를 보게 되었다. 결혼준비에 쌓인 스트레스 덕에 지쳐서 무시할까도 했지만 어째 쉽게 넘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전시회 날을 찾아보았다. 10.12~26.
.. 그리고 오늘이 되었다. 느즈막히 일어나서 밥을 먹고 나갈 준비를 했다. 집을 나서서 1시간 30분이 넘는 시간을 들여 도착하고 보니 어느덧 오후 5시. 폐관시간이 6시였는데도 사람들의 줄이 꽤 긴 편이었다.
.. 5월 중순~말, 10월 중순~말에만 개관
.. 이게 2시간 전에는 3배의 줄이었다고 한다.
.. 생각보다 긴 시간은 아니었다. 한 10분? 15분? 낮에는 한시간 정도 기다렸다 입장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되려 늦게 간 것이 다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성북초등학교와 맞닿아 있는 간송미술관은 숲으로 둘러 쌓여있고, 옆에는 새도 키우고, 불상이 서 있고, 동자상이 서 있고, 탑이 서 있는 뭐라 해야 하나… 내가 알고 있던 정돈된 박물관이나 미술관처럼 격리된 공간과는 달리 함께 하는 공간이었다.
..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불상
.. 알고 보니 국내 최초의 사립 박물관이었다. 처음에는 이름이 보화각이었는데 나중에 간송미술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런 것도 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 나는 왜 보화각 설립 70주년인가 했다.
.. 보화각 입구
.. 보화각 내부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어 이런 저런 사진을 올릴 수는 없다. 입장 하기 전에 어떤 분이 나와서 설명하기를,
.. "바람의 화원을 보고 오신 분은 2층에 신윤복의 그림이 6점 있습니다."
.. 라고 하기에 알게 된 사실. 요새 하는 드라마 중에 '바람의 화원'이라는 게 있나 본데 거기에 김홍도와 신윤복이 나오나 보다. 마침 이번
전시의 주제가 조선시대 서화대전이어서 신윤복의 미인도를 비롯하여 단오 등 신윤복의 주요 그림이 여러장 전시되어 있었다.
.. 신윤복의 그림은 미인도를 제외하고는 사이즈가 작은 편이라 놀랐고, 그 색의 선명도가 아직도 매우 뚜렷한 편이라 더더욱 놀랐다. 솔직히 말해서 전혀 바래지 않은 그림을 보고 있자니 위작이나 사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근데, 단오나 다른 그림들은 그렇다 치고 미인도는 그다지 미인이란 느낌을 못 받겠는게 내가 눈이 이상한 건지………….
.. 김홍도의 그림도 있었고, 정선의 그림도 있었다. 하나같이 국사책이나 미술책에서 본 듯한 기억이 살피 스쳐가는 그림들. 특히나 정선의 산수화는 압권이었다. 빨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잠시 들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또 기억나는 그림은 마군후(馬君厚)의 반묘가수(班猫假羞)였다. 얼룩 고양이가 선잠을 자는 그림이었는데 그 고양이가 사실적이기도 했지만 너무나 귀여워서 인상에 남았다.
.. 글로 치자면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던가 여러가지가 많았으나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혜경궁 홍씨의 언문이었다. 그야말로 '궁서체'의 표본이라 할까? 그리고 정조나 선조의 글씨도 꽤나 멋진 글씨여서 감탄하면서 봤다. 최고로 감탄한 것은 정명공주가 썼다는 화정(華政). 선조와 인목왕후 사이에 태어난 공주라고 하는데 뜻은 '빛나는 정치'라고 한다. 이게 왜 인상이 깊었냐고 하면은 글자 하나가 정방 70cm는 촉히 됨직한 엄청나게 큰 사이즈였다. 남자라도 필치가 흐트려질만 한데 전혀 흐트림 없는 필치로 멋들어지게 써내었다.
.. 등등의 것을 보고 나왔다. 여기에 뭐라고 쓸만큼의 식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서 나오면서 전시회 작품의 도감(? 정확한 명칭을 모르겠다)을 샀다. 전시회에 나온 작품들의 사진과, 해설이 실려 있는 책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위에 적은 이름이나 서화의 제목은 이 책을 보면서 적었다.
.. 간송문화 제 75호 서화 십일 보화각설립칠십주년기념서화대전
.. 가격은 2만원이었지만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다만 책에 실린 사진을 보니 직접 보던 신윤복의 그림과 책에 실린 신윤복의 사진의 색감이 차이가 많이 났다. 책에 실린 사진은 내가 전에부터 보아왔던 사진이었고, 실제 봤던 신윤복의 그림이나 기타 그림들은 훨씬 화사한 색감이 났다. 사진의 문제일까?
.. 전시 자체는 다 좋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유리가 옛날 유리라서 그런지 빛이 굴절되면서 울렁거리는 현상이 있었다. 이 정도는 나라에서 좀 보조해줘도 되지 않나 싶을 정도. 계속 보기에는 눈이 좀 아팠다.
.. 그렇게 한시간여의 짧은 관람을 마치고 나와서 돌아오게 되었다. 평일에 가서 느긋하게 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으나 아쉽게도 휴가가 모자라다…………. 옆에서는 혼자 가서 볼거라면서 염장이나 지르고 있고…… 흙.
.. Words of Yu-Tak Kim, the elemental of the w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