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tist : 먼여행님
.. date : 2000.01.23
Hill with the Wind
한달음으로 언덕을 오르면 그 언덕 위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막혀있다시피 한 이곳에서 유일한 언덕에 솟은 이 나무는 사람들에게 나침반 같은 구실을 한다. 나무가 어느쪽에 보이는가가 방향을 알려주는 거다. 그렇지만 이렇게 언덕을 오르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나무는 언제나 한결같이 서 있어서 매년 얼마나 그 나무가 자라는지, 언제 그 나무가 저 자리에 생겨났는지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끔찍한 곳이야. 그렇지 않니?"
나는 나무의 허리를 쓸어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언덕에 오르면 마을을 둘러싼 산들이 더욱 더 또렷이 보였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산 꼭대기에서 매일 태양이 떠오르고, 또 매일 태양이 그곳으로 숨어든다. 산은 하늘이 허락한 최고의 성벽이라고 했다. …하지만 무엇을 막기 위한? 아무도 그 말을 해주지는 않았다. 이 곳은 신의 보살핌을 받아서 이렇게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거라고 이야기했지만, 이 마을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한 것처럼 조금의 변화도 없이 계속해서 흘러가게 될 것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것이 안전인가? 자신은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이 매일 해가 뜨고, 에프르 나무가 노란 빛이 되는 때가 되면 추수를 하고 매 끼니를 이어가고, 선택된 자들은 '아이'를 갖고,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도록 조금의 변화도 없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시간들을 평화라고 불러도 좋은 것일까.
"리엘! 어서 내려오지 못하겠니?!"
언덕 아래에서 아주머니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한숨을 쉬며 나무에서 손을 떼어냈다.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나무 앞에서 자신이 느끼는 이런 느낌들을.
"또 올게… 엘로브."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고 몇번이나 뒤돌아보며 나는 언덕을 내려갔다.
"어서 씻고 들어와라. 사람들이 얼마나 찾고 있었는줄 아니?"
"…네."
아주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서는 것과 엇갈려 카알이 문 밖으로 나섰다. 아주머니가 그토록 화나 있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아직 해도 지기 전에 집 앞에 등불이 걸려 있었던 이유도. 나는 굳은 얼굴의 카알에게 힘겹게 물었다.
"…그래. 누구 누구 왔어?"
"밀르 부인, 케셀 부인, 로파 부인. 그리고…"
"하아."
더 듣지 않아도 좋았다. 이 마을에 '아이'를 원하는 부인들은 한둘이 아니다. 열일곱이 된 여자아이는 최근 3년간 한명도 없었으므로 그들은 조바심이 날 대로 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이'를 위한 소녀. 그들에게 나는 그런 것이다.
"리엘. 부탁이니 사고 치지 마."
카알은 딱딱하게 덧붙였다. 동갑내기인, 아주머니의 아들. 그러나 소녀가 아니니까- 열일곱의 남자아이에게 붙는 의무같은 것은 없으니까. 이 마을 사람들 누구나가 그렇듯이 그저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좋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알아."
나는 짧게 대답하고 곧장 욕실로 들어섰다. 따뜻하게 데워놓은 물이 가득찬 욕조 옆에 얌전하게 흰 옷이 놓여 있었다. 이렇게 혼자서 욕실을 쓸 수 있는 것은 '소녀'이기 때문. 열일곱이 된, '아이'를 위한 소녀이기 때문이었다. 목욕을 하고, 머리를 곱게 새로 빗고, 하얀 옷을 입고 거실로 들어서자 문소리를 듣고 열 여덟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내 쪽으로 향했다.
"생일 축하한다, 리엘-"
누가 먼저 말했는지도 알 수 없게 동시에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테이블에 가득 놓인 꽃다발들, 상기된 얼굴들이 부담스러웠다. 언니 레아나가 열일곱이었을 때, 나는 갓 열살이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프리지아화관을 쓴 레아나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던 프리지아의 향. 2년만에 나타난 열일곱살의 '소녀'. 수많은 눈동자 앞에서 제단을 향해 걸어가던 레아나. 제석祭石 바로 앞에서 레아나가 부르짖던 이름.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제단을 휘감던 바람. 거센 바람. 바람에 흩날리던 레아나의 초록빛 머리결.
"리엘! 뭐하고 있는거니?"
아주머니의 음성에 나는 화들짝 깨어났다. 걱정스러운 사람들의 눈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다. '저 아이도 제 언니처럼 그런 건 아니겠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고 자리에 앉자 사람들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이'를 바라는 탐욕의 눈. 열 살때의 나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수 있다. 우스운 일이다. 다른 '소녀'가 있었다면, 출생을 알 수 없는 초록빛 머리카락의 나에게는 관심조차 없었을텐데.
"집에다 맛있는 걸 많이 마련해 놓았단다. 리엘. 오늘 우리 집에 가지 않겠니?"
"로파. 당신 음식 솜씨는 내가 잘 알아요. 그보다 리엘, 리엘이 좋아하는 과일쨈을 오늘 좀 만들어 봤는데-."
"카즈. 과일쨈이라면 당신보다 우리 어머니께서 잘 만드시지. 리엘-"
다투듯이 서로,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 달콤한 말들을 늘어놓는다. 의식이 있기 전에 '소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주머니는 흐뭇한 얼굴을 하고 그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있었다. 그들 중에 누가 나를 데려갈것인가는 나보다 아주머니에게 더 중요한 문제일테니까. 가끔 묻고 싶어진다. 당신들도 '소녀'였던 적이 있는 건가? 지금 이렇게 내 앞에서 정신없이 눈을 빛내고 있는 당신들도, 예전엔 나의 자리에서 당신들을 향해 눈을 빛내는 '여자'들을 보았는가? 그런데도 당신들은, 지금 이렇게 있는 건가.
"…전, 쉬고 싶어요."
어렵게 말을 꺼내자마자 눈동자들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렇지만 얼굴에 힘겹게 그린 웃음을 거두지는 않았다. 의식은 내일 아침. 그 때까지는 저 얼굴들에서 웃음이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럼 올라가서 쉬렴. 악몽 꾸지 말고."
"네."
이층 내 방에 들어온지 얼마 후, 방문을 다시 확인해보니 바깥에서부터 걸려 있었다. 창 밖으로 내려다본 바깥은 어두웠다. 이즈러진 달빛은 뒷뜰도 밝혀주지 못했다. 얼굴만이 겨우 나갈 수 있을만큼 조그만 창문. '소녀'가 있어야 할 곳은 그렇게 닫혀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의식이 있기 전까지. 나는 의자를 당겨 창 바로 아래에 앉았다. 보름달만한 창문을 통해 이즈러진 달빛이 방 안으로 수줍게 비쳐들었다.
"…엘로브…."
선득한 바람이 한줄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설마. 착각일거라 생각한 순간, 달빛이 만든 바닥의 빛그림이 불쑥, 형체를 갖추며 높아졌다. 그것은- 소년이었다. 내 또래? 아니 그보다는 조금 나이가 들었을 것 같은, 어쩌면 나보다 어린 것 같기도 한,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려운 소년 하나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누구세요?"
"엘로브."
소년은 조금 웃었다. 소년의 손끝이 달빛에 조금 움직이자 그 끝에 새파란 모자가 생겨났다. 바다빛의 모자를 쓴 소년은 더욱 나이를 알 수 없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설마- 엘로브는…"
"언덕의 나무 이름이라고요? 당신이 지어준 이름이니까, 아무도 알 리 없다고?"
소년은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레아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
"당신을 만나고 싶어해요. 아주- 오랫동안."
좁은 방, 달빛이 조금 스며드는, 바람이 선선히 불어오는 방 안의 풍경이 순식간에 회오리치며 바뀌고, 나는 언덕 위에 있었다. 나무-엘로브가 변함없이 서 있는 언덕 위. 밤바람이 서늘하게 부는 언덕 위 어디에도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얘, 언니?"
나무의 등에 손을 얹은 건 그저- 습관일 뿐이었다. 밤이면 밖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밤풍경이 너무 낯설어서 그랬을지도. 순간 내가 짚은 곳이 푹- 하고 꺼져들면서 팔이 나무 속에 빠져든다 싶더니 내 몸은 그 안으로 순식간에 쏠려버렸다. 새까만 배경으로 끝이 없을 것 같은 수직낙하. 한참 후 푹신한 무언가가 내 몸을 받쳤다. 갑작스럽게 빛이 주변에 쏟아져 들어와 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괜찮니, 리엘?"
누군가가 나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익숙한 향이 풍겼다. 말린 포푸리의 향기같은- 때로는 방금 피어난 프리지아 향 같았던 머릿내음이었다.
"레아나?!"
눈이 서서히 주변의 빛에 익숙해지자 날 부축한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7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레아나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거기 서 있었다. 그 길던 초록색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을 뿐이었다. 작은 바람에도 펄럭일 것 같은 새하얀 옷- 의식때 입었던 그 옷을 입고. 나는 마치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온 것만 같았다. 아직 어렸던 나를 가만히 쳐다보며 슬픈 얼굴을 하던 레아나를, 다시 볼 수 있다니.
"이렇게 자랐구나- 시간이 그렇게 흘렀니, '그곳'에선?"
"…레아나…?"
"그래. 레아나- 언니야. 리엘. 니가 무척 보고 싶었어."
나는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레아나를 올려다보았다. 이것은 꿈이 아닐까. 도망치고 싶다는 내 희망이 이런 꿈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레아나에게 손을 뻗는 순간 꿈이 깨면서, '의식'의 날 아침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마치 꿈인 것처럼, 레아나는 7년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런 의문들은 머리속에서만 맴돌고, 나는 그저 일어나 레아나에게 얼굴을 파묻었다. 짙은 프리지아 향기.
"…왜 버리고 갔어- 혼자 남겨두고-"
울먹이는 내 등을 레아나는 몇 번이나 쓸어주었다. 어렸을 때 그랬듯이.
한참이 지난 후에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내가 떨어진 곳은 커다란 절벽의 아래였다. 절벽 벽면에 사람 둘 정도가 겨우 빠져나올 만한 굴이 나 있었다. 부자연스럽게 긁어 모아놓은 짚더미 위에 내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이 굴 끝은 그 언덕으로 이어져 있어. 평소에는 입구가 막혀 있지만."
레아나는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그렇다면 이 높은 절벽 끝에 내가 태어나고 자란 그 곳이 있다는 것일까. 사방이 높은 산으로 막혀 있는 곳. 산이 해를 품었다 토해내고 산이 달을 품었다 토해내곤 하는 그 마을이, 저 꼭대기에 있다고? 그러나 산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이 곳에도 달은 떠 있었다. 마을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보이는 둥그런 달이, 밤인데도 이 곳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엘로브가 아니었다면, 도망치지 못했을 거야, 나도."
"…엘로브?"
소년은 계속 옆에 담담히 서 있다가, 그제야 조금 웃었다.
"당신이 계속 불러 주었기 때문에- 잊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소녀'가 그 곳에 아직 있다는 걸."
"내가 갔어야 하지만, 다시 가고 싶지 않았어. 그 곳으론."
레아나는 내 손을 붙잡고 앞장서 걸었다. 깎아지른 절벽을 등지고 선 내 눈에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끝없는 잡목림이 보였다. 비록 한 쪽 방향이지만 시야가 무엇에도 막히지 않고 펼쳐져 있다. 이런 세상은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산'을 넘어가면 무엇이 있을까, 꿈꾸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발 밑에 느껴지는 풀숲의 감촉까지도 마을과 다른 것 같다. 달빛 탓일까.
"…나, 꿈꾸고 있는 거야?"
멍하니 말하는 나를 보고 레아나와 소년- 엘로브- 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저렇게 소리 높여 웃는 레아나는, 저렇게 환하게 웃는 레아나는 낯설다.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서는 안된다고 했지, '소녀'들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 넌 이만한 꼬마였지."
"그 때, 레아가 날 불렀을 때- 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울어 버렸었죠."
두 사람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며 나를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얼굴에는 가득 웃음을 머금고. 하지만 왜일까, 저 눈빛이 그렇게도 차갑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이'를 위해 아주머니의 집에 모여들어 나를 향해 위장된 웃음을 흘리던 부인들의 얼굴처럼 보이는 건. …뭐지, 이 삐그덕대는 느낌은?
…아아. 그래.
꿈이다… 이건.
의식의 전날, '소녀'를 유혹하는 악몽.
나는 피식, 웃음지었다. 레아나가, 엘로브가, 아니 사실은 그 둘이 아닌 것들이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변함없이 차가운 눈동자를 하고서.
"거짓말. 넌 레아나가 아냐. 너는 엘로브가 아냐."
주변의 영상들이 순간 조금, 흔들린 듯도 했다.
"리엘- 무슨 소리야 그게?!"
레아나의 모습을 한 그것이 내게 말했다. 나는 차갑게 웃는 얼굴을 한 채로 그것들에게 대답한다.
"레아나의 의식때, 나는 울지 않았어…. 눈을 동그랗게 뜨지도 않았어. 레아나가 날 마지막으로 봤을 때 난 그렇게 작지 않았어- 너희들은, 환영幻影이야."
풍경들이 흔들리면서 일그러지고, 거대한 색과 빛의 섞임으로 나를 감싼다. 이것은 꿈. '소녀'를 유혹하는 악몽. 그러니 이 꿈에서 깨어나면- 의식의 아침.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해가 떠오르기 전의 히뿌연 빛이 방 안에 맺혀 있었다.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잠든 사이에 아주머니가 들어왔는지, 의식을 위한 흰 옷이 탁자에 고이 놓여 있었다. …이제는 두렵지 않아. 악몽에서 깨어난 것은 그 덕분이다.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자리옷 차림 그대로 내려가 몸을 씻고 다시 올라왔다. 흰 옷 위의 내 머리카락은 평소보다 더 짙은 초록빛이었다.
아주머니는 어린 아이를 품에 안은 꼬마 여자아이가 집 앞에서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안으로 들였다고 했다. 마을에 '아이'는 다섯이었고, 그 중에 여자아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꼬마와 아기가 어디서 왔는지도,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아주머니가 맡아서 키운 건 둘이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꼬마도 아기도 모두 옅은 금발을 하고 있더니 자랄수록 머리에 초록빛이 진해졌다.
신神이 이 마을을 지켜주는 대가로, 이 마을의 '여인'들은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신이 이 마을을 숲으로 감싼 날에 이미 어른이었던 여인들은 모두 그렇게 되었다. 남은 것은 그 때 아직 아이였던 사람들 뿐이었다. 처음 몇 년간, 사내들은 미친 듯이 소녀들을 겁탈했다. 소녀들이 몇 명인가 미쳐버린 후, 마을 사람들은 모여서 마을이 존속하기 위한 규칙을 세웠다. 여자아이가 열 일곱이 될 때까지, 아이는 마을 공동의 소유나 마찬가지였다. 보호자라 할지라도 그 아이를 어떻게 할 수 없다. 열 일곱의 생일, 그 다음날의 해가 떠오를 때 '소녀'를 위한 제단을 세웠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꽂히면 '소녀'는 자신의 아이를 낳을 아버지를 결정할 유일한 권한을 가졌다. 그 이후 '소녀'는 아이를 낳고 몸을 추스릴 때까지 아이의 아버지 집에서 머물렀다. 매년 생일마다 그런 의식이 이뤄지고, 그렇게 3년이 지나 '소녀'가 스물이 되면 '소녀'는 '여인'이 되었다. 신神이 마을을 감싸준 그 날에 있었던 사람들처럼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주머니는 레아나가 그렇게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소녀를 키운 보호자에게 마을에서 주는 재산상의 이익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7년간, 다른 아이들이 소녀가 되고, 그 집안이 금새 부유해 지는 것을 보고 아주머니의 기분은 어땠을까. 가엾은 사람. 가엾은 사람.
"다 됐니?"
문 밖에서 아주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머리를 다시 한 번 빗어내렸다. 바람이 불테니까. 아주 강한 바람이.
"…예쁘구나."
어느새 들어와 아주머니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조금 웃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는 광장에 이미 제단이 세워져 있었다. 맨 앞줄에 있는 사람들은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 옆에 그들의 손을 붙잡고 선 그들의 아내들. 예전에는 '소녀'였던, 두세명의 '아이'를 낳고 '여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서 있었다.
제단 아래에 서 있던 카알이- 아마도 내가 '여인'이 되면 아내가 될 것이 틀림없는- 내 머리에 화관을 씌워 주었다. 7년 전처럼 프리지아 화관에서는 숨이 막힐 것처럼 짙은 향이 풍겼다. 제단 위에 촌장이 긴장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촌장의 아들 역시 저 제단 아래 맨 앞줄에서 눈을 빛내며 제단을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담담한 얼굴로 제단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걸음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애나스 리엘, 제석祭石 위에 서거라."
촌장이 말했다. 나는 제석祭石앞에 멈춰 선채로 촌장을 쳐다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얼굴 가득 웃음이 퍼져나왔다. 가엾은 사람들-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날 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애나스 리엘. 네 이름을 부르는 게 안 들리느냐?"
촌장이 다시 말했다. 나는 촌장을 향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내 이름이 아냐."
웅성거림. 의식을 방해할까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앞줄의 부부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옆사람을 보고, 불안스러운 말을 쏟아내었다. 아주머니의 얼굴은 아예 눈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7년 전에도 이랬지. '그건 내 이름이 아니에요.' 라고 언니가 말했다. 언니는 나를 보았다. 열 살박이 나는 한달음으로 사람들을 뚫고 제단 바로 아래까지 뛰어왔다. 언니가 말했다. '도와줘- 윈드, 내 동생아.' 나는 웃었다.
"내 이름은 윈드. 엘로브 윈드."
사람들 앞에서 나는 '나'가 되었다. 7년 전, 언니 다르크dark는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해 주었다. 아직 아이로 살아가야 할 나를 위해서.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 없지. 나는 이 곳을 떠날테니까. 그러니- 그 날처럼 언니만을 피하게 할 필요도 없다. 나는 등에서 <현>을 내려 연주를 시작했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거센 바람이. 바람 속에서 내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엘로브임을 나타내는 초록빛의 머리카락.
나는 제석 앞에서 언덕을 보았다. 나무는 내 눈앞에서 서서히 자라기 시작했다. 휘감은 바람에도 나무는 흔들림없이 조금씩 둥치가 굵어지고, 그 둥치를 문처럼 열고 언니가 나왔다. 여자아이들이 노래를 듣고, 바람을 피해 언덕으로 올라갔다. 거센 바람은 아이들을 몰고 언덕까지 벽이 되어 주었다. 언니의 웃음이 보였다. 먼 거리에서도. 언덕이, 바람이 벽으로 둘러싼 언덕이 어둠으로 덮였다.
음악 속에서 나는 사라진다. 내가 가야 할 곳으로. 가엾은 사람들.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을 남겨두고. 사람들이 깨어나면 언덕도, 나무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금방 잊을 것이다. 바람이 맴돌던 언덕이 있었던 것도, 초록 머리를 한 두 소녀가 있었던 것도, 의식이 무엇인지도.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르면 마을 사람들은 다시 아이를 낳게 될 것이다. 아버지는, 증오를 오래 두는 분이 아니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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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여.행. =D
.. date : 2000.01.23
한달음으로 언덕을 오르면 그 언덕 위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막혀있다시피 한 이곳에서 유일한 언덕에 솟은 이 나무는 사람들에게 나침반 같은 구실을 한다. 나무가 어느쪽에 보이는가가 방향을 알려주는 거다. 그렇지만 이렇게 언덕을 오르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나무는 언제나 한결같이 서 있어서 매년 얼마나 그 나무가 자라는지, 언제 그 나무가 저 자리에 생겨났는지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끔찍한 곳이야. 그렇지 않니?"
나는 나무의 허리를 쓸어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언덕에 오르면 마을을 둘러싼 산들이 더욱 더 또렷이 보였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산 꼭대기에서 매일 태양이 떠오르고, 또 매일 태양이 그곳으로 숨어든다. 산은 하늘이 허락한 최고의 성벽이라고 했다. …하지만 무엇을 막기 위한? 아무도 그 말을 해주지는 않았다. 이 곳은 신의 보살핌을 받아서 이렇게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거라고 이야기했지만, 이 마을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한 것처럼 조금의 변화도 없이 계속해서 흘러가게 될 것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것이 안전인가? 자신은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이 매일 해가 뜨고, 에프르 나무가 노란 빛이 되는 때가 되면 추수를 하고 매 끼니를 이어가고, 선택된 자들은 '아이'를 갖고,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도록 조금의 변화도 없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시간들을 평화라고 불러도 좋은 것일까.
"리엘! 어서 내려오지 못하겠니?!"
언덕 아래에서 아주머니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한숨을 쉬며 나무에서 손을 떼어냈다.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나무 앞에서 자신이 느끼는 이런 느낌들을.
"또 올게… 엘로브."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고 몇번이나 뒤돌아보며 나는 언덕을 내려갔다.
"어서 씻고 들어와라. 사람들이 얼마나 찾고 있었는줄 아니?"
"…네."
아주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서는 것과 엇갈려 카알이 문 밖으로 나섰다. 아주머니가 그토록 화나 있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아직 해도 지기 전에 집 앞에 등불이 걸려 있었던 이유도. 나는 굳은 얼굴의 카알에게 힘겹게 물었다.
"…그래. 누구 누구 왔어?"
"밀르 부인, 케셀 부인, 로파 부인. 그리고…"
"하아."
더 듣지 않아도 좋았다. 이 마을에 '아이'를 원하는 부인들은 한둘이 아니다. 열일곱이 된 여자아이는 최근 3년간 한명도 없었으므로 그들은 조바심이 날 대로 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이'를 위한 소녀. 그들에게 나는 그런 것이다.
"리엘. 부탁이니 사고 치지 마."
카알은 딱딱하게 덧붙였다. 동갑내기인, 아주머니의 아들. 그러나 소녀가 아니니까- 열일곱의 남자아이에게 붙는 의무같은 것은 없으니까. 이 마을 사람들 누구나가 그렇듯이 그저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좋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알아."
나는 짧게 대답하고 곧장 욕실로 들어섰다. 따뜻하게 데워놓은 물이 가득찬 욕조 옆에 얌전하게 흰 옷이 놓여 있었다. 이렇게 혼자서 욕실을 쓸 수 있는 것은 '소녀'이기 때문. 열일곱이 된, '아이'를 위한 소녀이기 때문이었다. 목욕을 하고, 머리를 곱게 새로 빗고, 하얀 옷을 입고 거실로 들어서자 문소리를 듣고 열 여덟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내 쪽으로 향했다.
"생일 축하한다, 리엘-"
누가 먼저 말했는지도 알 수 없게 동시에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테이블에 가득 놓인 꽃다발들, 상기된 얼굴들이 부담스러웠다. 언니 레아나가 열일곱이었을 때, 나는 갓 열살이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프리지아화관을 쓴 레아나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던 프리지아의 향. 2년만에 나타난 열일곱살의 '소녀'. 수많은 눈동자 앞에서 제단을 향해 걸어가던 레아나. 제석祭石 바로 앞에서 레아나가 부르짖던 이름.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제단을 휘감던 바람. 거센 바람. 바람에 흩날리던 레아나의 초록빛 머리결.
"리엘! 뭐하고 있는거니?"
아주머니의 음성에 나는 화들짝 깨어났다. 걱정스러운 사람들의 눈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다. '저 아이도 제 언니처럼 그런 건 아니겠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고 자리에 앉자 사람들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이'를 바라는 탐욕의 눈. 열 살때의 나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수 있다. 우스운 일이다. 다른 '소녀'가 있었다면, 출생을 알 수 없는 초록빛 머리카락의 나에게는 관심조차 없었을텐데.
"집에다 맛있는 걸 많이 마련해 놓았단다. 리엘. 오늘 우리 집에 가지 않겠니?"
"로파. 당신 음식 솜씨는 내가 잘 알아요. 그보다 리엘, 리엘이 좋아하는 과일쨈을 오늘 좀 만들어 봤는데-."
"카즈. 과일쨈이라면 당신보다 우리 어머니께서 잘 만드시지. 리엘-"
다투듯이 서로,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 달콤한 말들을 늘어놓는다. 의식이 있기 전에 '소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주머니는 흐뭇한 얼굴을 하고 그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있었다. 그들 중에 누가 나를 데려갈것인가는 나보다 아주머니에게 더 중요한 문제일테니까. 가끔 묻고 싶어진다. 당신들도 '소녀'였던 적이 있는 건가? 지금 이렇게 내 앞에서 정신없이 눈을 빛내고 있는 당신들도, 예전엔 나의 자리에서 당신들을 향해 눈을 빛내는 '여자'들을 보았는가? 그런데도 당신들은, 지금 이렇게 있는 건가.
"…전, 쉬고 싶어요."
어렵게 말을 꺼내자마자 눈동자들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렇지만 얼굴에 힘겹게 그린 웃음을 거두지는 않았다. 의식은 내일 아침. 그 때까지는 저 얼굴들에서 웃음이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럼 올라가서 쉬렴. 악몽 꾸지 말고."
"네."
이층 내 방에 들어온지 얼마 후, 방문을 다시 확인해보니 바깥에서부터 걸려 있었다. 창 밖으로 내려다본 바깥은 어두웠다. 이즈러진 달빛은 뒷뜰도 밝혀주지 못했다. 얼굴만이 겨우 나갈 수 있을만큼 조그만 창문. '소녀'가 있어야 할 곳은 그렇게 닫혀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의식이 있기 전까지. 나는 의자를 당겨 창 바로 아래에 앉았다. 보름달만한 창문을 통해 이즈러진 달빛이 방 안으로 수줍게 비쳐들었다.
"…엘로브…."
선득한 바람이 한줄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설마. 착각일거라 생각한 순간, 달빛이 만든 바닥의 빛그림이 불쑥, 형체를 갖추며 높아졌다. 그것은- 소년이었다. 내 또래? 아니 그보다는 조금 나이가 들었을 것 같은, 어쩌면 나보다 어린 것 같기도 한,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려운 소년 하나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누구세요?"
"엘로브."
소년은 조금 웃었다. 소년의 손끝이 달빛에 조금 움직이자 그 끝에 새파란 모자가 생겨났다. 바다빛의 모자를 쓴 소년은 더욱 나이를 알 수 없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설마- 엘로브는…"
"언덕의 나무 이름이라고요? 당신이 지어준 이름이니까, 아무도 알 리 없다고?"
소년은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레아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
"당신을 만나고 싶어해요. 아주- 오랫동안."
좁은 방, 달빛이 조금 스며드는, 바람이 선선히 불어오는 방 안의 풍경이 순식간에 회오리치며 바뀌고, 나는 언덕 위에 있었다. 나무-엘로브가 변함없이 서 있는 언덕 위. 밤바람이 서늘하게 부는 언덕 위 어디에도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얘, 언니?"
나무의 등에 손을 얹은 건 그저- 습관일 뿐이었다. 밤이면 밖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밤풍경이 너무 낯설어서 그랬을지도. 순간 내가 짚은 곳이 푹- 하고 꺼져들면서 팔이 나무 속에 빠져든다 싶더니 내 몸은 그 안으로 순식간에 쏠려버렸다. 새까만 배경으로 끝이 없을 것 같은 수직낙하. 한참 후 푹신한 무언가가 내 몸을 받쳤다. 갑작스럽게 빛이 주변에 쏟아져 들어와 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괜찮니, 리엘?"
누군가가 나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익숙한 향이 풍겼다. 말린 포푸리의 향기같은- 때로는 방금 피어난 프리지아 향 같았던 머릿내음이었다.
"레아나?!"
눈이 서서히 주변의 빛에 익숙해지자 날 부축한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7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레아나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거기 서 있었다. 그 길던 초록색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을 뿐이었다. 작은 바람에도 펄럭일 것 같은 새하얀 옷- 의식때 입었던 그 옷을 입고. 나는 마치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온 것만 같았다. 아직 어렸던 나를 가만히 쳐다보며 슬픈 얼굴을 하던 레아나를, 다시 볼 수 있다니.
"이렇게 자랐구나- 시간이 그렇게 흘렀니, '그곳'에선?"
"…레아나…?"
"그래. 레아나- 언니야. 리엘. 니가 무척 보고 싶었어."
나는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레아나를 올려다보았다. 이것은 꿈이 아닐까. 도망치고 싶다는 내 희망이 이런 꿈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레아나에게 손을 뻗는 순간 꿈이 깨면서, '의식'의 날 아침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마치 꿈인 것처럼, 레아나는 7년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런 의문들은 머리속에서만 맴돌고, 나는 그저 일어나 레아나에게 얼굴을 파묻었다. 짙은 프리지아 향기.
"…왜 버리고 갔어- 혼자 남겨두고-"
울먹이는 내 등을 레아나는 몇 번이나 쓸어주었다. 어렸을 때 그랬듯이.
한참이 지난 후에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내가 떨어진 곳은 커다란 절벽의 아래였다. 절벽 벽면에 사람 둘 정도가 겨우 빠져나올 만한 굴이 나 있었다. 부자연스럽게 긁어 모아놓은 짚더미 위에 내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이 굴 끝은 그 언덕으로 이어져 있어. 평소에는 입구가 막혀 있지만."
레아나는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그렇다면 이 높은 절벽 끝에 내가 태어나고 자란 그 곳이 있다는 것일까. 사방이 높은 산으로 막혀 있는 곳. 산이 해를 품었다 토해내고 산이 달을 품었다 토해내곤 하는 그 마을이, 저 꼭대기에 있다고? 그러나 산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이 곳에도 달은 떠 있었다. 마을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보이는 둥그런 달이, 밤인데도 이 곳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엘로브가 아니었다면, 도망치지 못했을 거야, 나도."
"…엘로브?"
소년은 계속 옆에 담담히 서 있다가, 그제야 조금 웃었다.
"당신이 계속 불러 주었기 때문에- 잊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소녀'가 그 곳에 아직 있다는 걸."
"내가 갔어야 하지만, 다시 가고 싶지 않았어. 그 곳으론."
레아나는 내 손을 붙잡고 앞장서 걸었다. 깎아지른 절벽을 등지고 선 내 눈에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끝없는 잡목림이 보였다. 비록 한 쪽 방향이지만 시야가 무엇에도 막히지 않고 펼쳐져 있다. 이런 세상은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산'을 넘어가면 무엇이 있을까, 꿈꾸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발 밑에 느껴지는 풀숲의 감촉까지도 마을과 다른 것 같다. 달빛 탓일까.
"…나, 꿈꾸고 있는 거야?"
멍하니 말하는 나를 보고 레아나와 소년- 엘로브- 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저렇게 소리 높여 웃는 레아나는, 저렇게 환하게 웃는 레아나는 낯설다.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서는 안된다고 했지, '소녀'들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 넌 이만한 꼬마였지."
"그 때, 레아가 날 불렀을 때- 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울어 버렸었죠."
두 사람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며 나를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얼굴에는 가득 웃음을 머금고. 하지만 왜일까, 저 눈빛이 그렇게도 차갑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이'를 위해 아주머니의 집에 모여들어 나를 향해 위장된 웃음을 흘리던 부인들의 얼굴처럼 보이는 건. …뭐지, 이 삐그덕대는 느낌은?
…아아. 그래.
꿈이다… 이건.
의식의 전날, '소녀'를 유혹하는 악몽.
나는 피식, 웃음지었다. 레아나가, 엘로브가, 아니 사실은 그 둘이 아닌 것들이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변함없이 차가운 눈동자를 하고서.
"거짓말. 넌 레아나가 아냐. 너는 엘로브가 아냐."
주변의 영상들이 순간 조금, 흔들린 듯도 했다.
"리엘- 무슨 소리야 그게?!"
레아나의 모습을 한 그것이 내게 말했다. 나는 차갑게 웃는 얼굴을 한 채로 그것들에게 대답한다.
"레아나의 의식때, 나는 울지 않았어…. 눈을 동그랗게 뜨지도 않았어. 레아나가 날 마지막으로 봤을 때 난 그렇게 작지 않았어- 너희들은, 환영幻影이야."
풍경들이 흔들리면서 일그러지고, 거대한 색과 빛의 섞임으로 나를 감싼다. 이것은 꿈. '소녀'를 유혹하는 악몽. 그러니 이 꿈에서 깨어나면- 의식의 아침.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해가 떠오르기 전의 히뿌연 빛이 방 안에 맺혀 있었다.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잠든 사이에 아주머니가 들어왔는지, 의식을 위한 흰 옷이 탁자에 고이 놓여 있었다. …이제는 두렵지 않아. 악몽에서 깨어난 것은 그 덕분이다.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자리옷 차림 그대로 내려가 몸을 씻고 다시 올라왔다. 흰 옷 위의 내 머리카락은 평소보다 더 짙은 초록빛이었다.
아주머니는 어린 아이를 품에 안은 꼬마 여자아이가 집 앞에서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안으로 들였다고 했다. 마을에 '아이'는 다섯이었고, 그 중에 여자아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꼬마와 아기가 어디서 왔는지도,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아주머니가 맡아서 키운 건 둘이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꼬마도 아기도 모두 옅은 금발을 하고 있더니 자랄수록 머리에 초록빛이 진해졌다.
신神이 이 마을을 지켜주는 대가로, 이 마을의 '여인'들은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신이 이 마을을 숲으로 감싼 날에 이미 어른이었던 여인들은 모두 그렇게 되었다. 남은 것은 그 때 아직 아이였던 사람들 뿐이었다. 처음 몇 년간, 사내들은 미친 듯이 소녀들을 겁탈했다. 소녀들이 몇 명인가 미쳐버린 후, 마을 사람들은 모여서 마을이 존속하기 위한 규칙을 세웠다. 여자아이가 열 일곱이 될 때까지, 아이는 마을 공동의 소유나 마찬가지였다. 보호자라 할지라도 그 아이를 어떻게 할 수 없다. 열 일곱의 생일, 그 다음날의 해가 떠오를 때 '소녀'를 위한 제단을 세웠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꽂히면 '소녀'는 자신의 아이를 낳을 아버지를 결정할 유일한 권한을 가졌다. 그 이후 '소녀'는 아이를 낳고 몸을 추스릴 때까지 아이의 아버지 집에서 머물렀다. 매년 생일마다 그런 의식이 이뤄지고, 그렇게 3년이 지나 '소녀'가 스물이 되면 '소녀'는 '여인'이 되었다. 신神이 마을을 감싸준 그 날에 있었던 사람들처럼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주머니는 레아나가 그렇게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소녀를 키운 보호자에게 마을에서 주는 재산상의 이익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7년간, 다른 아이들이 소녀가 되고, 그 집안이 금새 부유해 지는 것을 보고 아주머니의 기분은 어땠을까. 가엾은 사람. 가엾은 사람.
"다 됐니?"
문 밖에서 아주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머리를 다시 한 번 빗어내렸다. 바람이 불테니까. 아주 강한 바람이.
"…예쁘구나."
어느새 들어와 아주머니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조금 웃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는 광장에 이미 제단이 세워져 있었다. 맨 앞줄에 있는 사람들은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 옆에 그들의 손을 붙잡고 선 그들의 아내들. 예전에는 '소녀'였던, 두세명의 '아이'를 낳고 '여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서 있었다.
제단 아래에 서 있던 카알이- 아마도 내가 '여인'이 되면 아내가 될 것이 틀림없는- 내 머리에 화관을 씌워 주었다. 7년 전처럼 프리지아 화관에서는 숨이 막힐 것처럼 짙은 향이 풍겼다. 제단 위에 촌장이 긴장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촌장의 아들 역시 저 제단 아래 맨 앞줄에서 눈을 빛내며 제단을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담담한 얼굴로 제단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걸음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애나스 리엘, 제석祭石 위에 서거라."
촌장이 말했다. 나는 제석祭石앞에 멈춰 선채로 촌장을 쳐다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얼굴 가득 웃음이 퍼져나왔다. 가엾은 사람들-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날 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애나스 리엘. 네 이름을 부르는 게 안 들리느냐?"
촌장이 다시 말했다. 나는 촌장을 향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내 이름이 아냐."
웅성거림. 의식을 방해할까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앞줄의 부부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옆사람을 보고, 불안스러운 말을 쏟아내었다. 아주머니의 얼굴은 아예 눈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7년 전에도 이랬지. '그건 내 이름이 아니에요.' 라고 언니가 말했다. 언니는 나를 보았다. 열 살박이 나는 한달음으로 사람들을 뚫고 제단 바로 아래까지 뛰어왔다. 언니가 말했다. '도와줘- 윈드, 내 동생아.' 나는 웃었다.
"내 이름은 윈드. 엘로브 윈드."
사람들 앞에서 나는 '나'가 되었다. 7년 전, 언니 다르크dark는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해 주었다. 아직 아이로 살아가야 할 나를 위해서.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 없지. 나는 이 곳을 떠날테니까. 그러니- 그 날처럼 언니만을 피하게 할 필요도 없다. 나는 등에서 <현>을 내려 연주를 시작했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거센 바람이. 바람 속에서 내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엘로브임을 나타내는 초록빛의 머리카락.
나는 제석 앞에서 언덕을 보았다. 나무는 내 눈앞에서 서서히 자라기 시작했다. 휘감은 바람에도 나무는 흔들림없이 조금씩 둥치가 굵어지고, 그 둥치를 문처럼 열고 언니가 나왔다. 여자아이들이 노래를 듣고, 바람을 피해 언덕으로 올라갔다. 거센 바람은 아이들을 몰고 언덕까지 벽이 되어 주었다. 언니의 웃음이 보였다. 먼 거리에서도. 언덕이, 바람이 벽으로 둘러싼 언덕이 어둠으로 덮였다.
음악 속에서 나는 사라진다. 내가 가야 할 곳으로. 가엾은 사람들.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을 남겨두고. 사람들이 깨어나면 언덕도, 나무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금방 잊을 것이다. 바람이 맴돌던 언덕이 있었던 것도, 초록 머리를 한 두 소녀가 있었던 것도, 의식이 무엇인지도.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르면 마을 사람들은 다시 아이를 낳게 될 것이다. 아버지는, 증오를 오래 두는 분이 아니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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