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학생이다(王蒙自述, 我的人生哲學)>> 왕멍 by hermod


.. 사실 내가 일본어를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다. 그냥저냥 적당히 회화 되고 적당히 읽을 줄 알고, 회화 되는 레벨에서 대충 쓸 줄 알고 정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하는가, 혹은 '정확한 단어와 표현을 사용하는가.' 라는 점에서는 아마도 초등학생 수준이 아닐까 싶다.

.. 중학교 3학년 때 히라가나/카타카나를 게임 때문에 익혔지만 그 뒤로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흔히들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게임을 하다보면 일본어는 자동적으로 익히게 된다고 했지만 내 일본어 실력은 대학교에 입학하고서 2년이 지나도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나마 칸지가 아닌 한자를 보고 때려잡는 정도의 독해는 가능했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일본어가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 아이러니하게 일본어가 가능해진 시점은 일본문화에서 대부분 물리적으로 차단된 군대에서였다. 넘쳐나던 일본어 텍스트도 없고, 일본음악도, 애니메이션도, 게임도 맘 놓고 즐길 수 없었던 그 시절에 일본어가 가능하게 되었다.

.. 군 생활 초반에는 군대에 적응하느라, 간부들이 끝도 없이 던져주는 일을 처리하느라 생존 그 자체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지만 열심히 레벨업한 결과 군생활이 1년을 조금 넘어선 시점에서는 같은 업무량에서도 나름대로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전역하고 뭘 해야하나 고민하는 시점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일본어였다.

.. 사실 일본어 자체에 강한 열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어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었다. 그저 내 취미 생활에 일본어가 매우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일본어를 익히긴 익혀야겠다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 시작은 체계적인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즈음 외박나가서 봤던 'GO'라는 영화의 원작 소설을 휴가 나갔다가 일본어판으로 사서 돌아온 것 부터였다.

.. 소설을 읽는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일단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1페이지를 읽는데 처음엔 30분 정도 시간이 걸렸다. 모르는 단어를 사전 찾아보고 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걸렸던 탓이었다. 그나마 익숙해지자 나중에는 그냥 '뜻을 때려잡으면서' 읽어나가는 수준이 되서 그럭저럭 읽어나갈 수 있었다.

.. 그리고 이 즈음해서 일본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하루하루 혹은 시간이 빌 때 할 것도 없고 해서 다이어리에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현재는 딱히 일기를 쓰지 않지만 당시에는 일주일에 3~4회 이상 일기를 쓰곤 했다. 10시 취침시간이 되어도 매일같이 야근 때문에 12시 이전엔 잠이 들지 않는 체질(아니 사실은 원래 선천적 야행성)이었던 나는 2시간 여를 멀뚱히 있기도 그렇고 소설을 읽거나 일기를 쓰는 2시간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기를 일본어로 쓰려고 맘 먹고 나니 일기를 쓰기 매우 힘들어졌다.

.. 일기를 쓸 때 우선 단어를 모르니까 한일사전을 먼저 찾았다. 그럼 거기 있는 단어를 일한사전으로 다시 찾았다. 각 예문에서 내가 쓰고 싶었던 문장과 가장 유사한 문장이라고 생각되는 문장을 조금씩 변형해서 일기를 써 나갔다. 군대였기 때문에 사전에도 없는 용어를 적기 위해서 한자를 무진장 뒤지는 일이 빈번했다. 처음 일기를 쓸 때는 겨우 한 문단 쓰는데 2시간씩 걸렸던 것이 나중에는 사전을 찾지 않고도(혹은 칸지 때문에 사전을 뒤져도) 슥슥 써나가게 되었다.

.. 또, 영내 이동 중에, 혹은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 일본어로 해당 상황을 설명하는 식으로 머리 속에서 정리하는 습관을 들였다. 예를 들면 '나는 길을 걷고 있다. 계단을 오르고 있다. 문을 열었다. 방에 들어갔다. 인사를 했다. 자리에 앉았다.' 이런 식이었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는 그것을 입밖으로 소리 내 보았다. 발음과 억양은 그동안 들어왔던 애니메이션이든 드라마든, 그런 부분에서 익숙해져 있는 발음과 억양을 따라했다.

.. 소설을 읽고, 일기를 쓰고, 일본어로 생각하고, 말을 해보고. 이것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냈는지 전역할 때 즈음. 그러니까 1년이 지난 즈음에는 어느 정도 일본어로 말이 튀어나오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일본어를 읽고, 쓰고, 듣고, 말하기가 가능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물론 전역하고 잘못된 표현을 바로 잡고, 어느정도 문법을 익히고 하는 과정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긴 했지만 학습곡선에서 지지부진한 초반의 낮은 경사도를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군대시절이었다.

사실은 역경에 처해 있을 때가 가장 배우기 좋은 상황이다.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여서 그 효과도 가장 크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시기에는 쉽게 방만하게 되며, 주위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친구, 추종자, 수행자, 이름을 듣고 찾아온 사람, 찾아와서 배움을 청하는 사람 등등-이 몰려든다. 이 시기에 당신은 강연을 하고, 글을 쓰며, 의견을 발표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또한 이 시기의 당신은 신념으로 가득 차 타인의 결점만 볼 것이다. 당신은 사회와 대중이 당신에게 거는 기대를 뿌듯하게 생각하고, 이들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각종 행사와 회식에 참석하는 횟수와 시간이 늘어난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당신이 확실히 그 자리에 있었음을 표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 hermod님의 글을 읽다가 저 부분에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군대가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지금과 같은 정도라도 일본어를 사용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사실, 취미가 일본어와 연관이 있다해도 나에게 강한 동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시간을 보내야 하고 멍하니 지내기보다는 귀찮아도 한 번 해보자라는 단순한 생각이었고, 그 단순한 생각을 뛰어넘는 자극이나 인간관계로 소비해야 하는 시간이 없었던 환경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 게으름으로는 아마 주위 사람 중에서 최고를 달릴 거라 생각되는 나로서는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란 환경이 아니었다면 아마 일본어를 익힐 수 없었을 터다. 사실 3달정도 중국어를 배우려고 시도해보았지만 '피곤하다, 졸리다, 머리에 안들어 온다.'라는 핑계를 대며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나를 봤을 때 이 점은 더욱 분명해 진다.

.. 지금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포기하지 않은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평생 배워야할 필요가 있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주변에 있는 그야말로 '천재류'의 사람들도 사실은 어떤 능력을 익히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아무런 부담 없이 해내는' 점은 잘 알고 있다. 내가 못하는 것은 내가 천재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일본어를 익힌 것은 나같이 게으른 녀석도 '환경의 도움을 받아 겨우 노력할 수 있었다.' 정도가 될 터이다.

.. 지금 내가 현실을 핑계삼아 도망치고 있는 것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저 '인정'하고 그에 대한 후속처리를 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사실 나를 다시 한 번 상기 시키기 위해서다.

.. 지금 난, 무언가를 열심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 Words of Yu-Tak Kim, the elemental of the wind.

Posted by BEW

2009/08/11 12:07 2009/08/11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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