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포항과 울산의 경기는 포항 팬에게 있어선 승점을 1점은 확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시작한다. 이 말은 반대로 뒤집으면 울산 팬들에게는 고비에서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다는 불안감을 낳는다는 뜻이다. 98년 플레이오프를 비롯해 고비마다 서로 고춧가루를 뿌려대다가 추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울산의 골문을 지키던 김병지가 포항으로 이적하면서 부터라고 한다. 한창 리그를 보지 못하던 때라 잘 기억은 안나지만 그 즈음부터 울산의 포항 징크스가 제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혹자는 김병지의 저주라고도 하지만…

.. 하지만 올 들어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컵대회에 2군을 내보낸 탓도 있지만 컵대회 2경기에서 울산에게 1무 1패를 기록했고 그마저 패배는 포항의 홈 한국 축구의 성지 스틸야드에서였다. 제대로 된 전력이 아니라는 변명이 마음 속에 자리잡았지만 12경기 연속 무승. 그 이후에도 광주를 상대로 겨우 1승을 거두고 여전히 무승부를 기록중인 포항에게 있어서 골 결정력 문제는 치명적. 그나마 직전의 FA컵에서 대학 강호 건국대를 만나 4:1의 신나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대학팀은 대학팀. K리그에서 꽤나 괜찮은 스쿼드를 갖추고 있는 울산과는 그리 쉽지만은 않은 만남이었다.

..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울산 전력의 30% 이상이라고 할만한 이천수를 빼놓을 수 없다. 이천수의 첼시행 루머가 보도되면서 가슴 한켠에 묘한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천수. 필드 외에서야 어쨌든 필드 내에서 그가 독기를 품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너무 많은 게임을 봐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유럽파를 제외한 한국 선수들 중에 최고의 사기유닛을 뽑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이천수를 뽑을 수밖에 없다. 그런 그가 첼시행의 꿈을 품고 전력을 다한다면… 그 생각만으로 부담은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 1. 포항의 올시즌 가장 큰 문제라면 역시 골 결정력의 부재. 2005년과 같은 공격력도 나오기 힘든데다가 2006년 초반의 이동국 후반의 고기구의 결정력은 온데간데 없다. 이동국의 대체로서 기대를 모았던 고기구는 첫 인천전 골 이후 침묵. 이광재는 경남전 이후 침묵. 황진성은 쉐도우가 아니면 힘을 쓰기에는 역시나 하드웨어의 문제가 있고 최태욱은 영입 이후 아주 길고 긴 침묵. 최효진을 돌려 쓰는 꼼수를 부려보기도 했으나 역시나 정통파는 아니고, 프론티니는 아예 침묵 왜 데려온지 조차 알 수 없다.

.. 그 결과가 지금의 성적이다. 아무리 미드필더의 중원 장악력이 뛰어나고 패스 전개력이 뛰어나더라도 골을 넣을 수 없다면 경기에서 승리할 수 없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역시나 3년 연속 같은 전술을 사용하는데 공격진의 역량은 점점 떨어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하기야 포항과 맞붙는 팀들은 기본적으로 수비를 두텁게 하고 최후방에서 최전선까지 종으로 찔러주는 전술을 선호하고 역시나 효과도 짭짤하다. 대전의 정성훈, 부산의 박성호에게 골을 헌납한 것은 그 반증이기도 하다.

.. 하지만 그래서일까 수비 조직을 두텁게 쌓기 시작한 포항은 골을 넣지 못하면서도 골을 먹지 않는 체제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포항-GS 0:0, 포항-수원 0:0 두 경기 모두 미들에서 공을 효율적으로 점유하고 두터운 수비를 쌓고 공격을 전개하는 점유축구의 진수를 보였음에도(심지어 몇몇 비 K리그 팬들로부터는 K리그의 경기력이 이렇게 뛰어났나! 라는 찬사까지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골을 넣지 못하여 안타까움을 낳았다. 다행히 지지 않았을 뿐 이겨야 되는 시점에서의 무승부는 뼈아픈 것이다. 그리고, 골을 넣지 못하는 팀은 상대에게 두려움을 줄 수가 없다. 바로 그것이 불안했다.


.. 2. 경기 시작 직전 선수들이 몸을 푸는 것을 차분하게 지켜보았다. 그나마 짧은 휴식기를 거쳐서인지 선수들의 몸이 가벼워보였다. 자세히 보니 최태욱이 선발. 정규리그 선발은 매우 오랜만인지 아니면 처음인지 기억조차 나질 않지만 어쨌든간에 최태욱을 선발로 보는 것은 꽤 흔치 않은 현상. 파리아스 감독이 얼마나 공격수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몸이 가벼운 포항의 미들진을 보며 어쩌면 오늘 무언가 하나 작품이 만들어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울산 쪽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좋아 보였다. 특히 이천수의 몸놀림은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고 우성용을 제치고 선발 출장한 양동현 역시 평소 이상의 느낌을 주었다. 잘하면, 아니 어쩌면 오늘 경기 대박 혹은 쪽박. 다득점 혹은 0:0의 예상을 할 수 있었다.

.. 최태욱과 이천수. 부평고 동기. 전국대회를 휩쓸고 다니던 이른바 깡패 유닛들. 하지만 02년을 기점으로 진정한 사기유닛으로 성장한 이천수와 어느덧 주전 자리가 애매해져버린 최태욱의 차이는 어딘가 모른게 씁쓸함을 낳는다. 팀의 팬으로써 말하자면 최태욱의 플레이는 많이 답답했다. 최전방 공격수로 나오면 그 빠른 스피드를 잘 활용하는 그가 사이드 미들로 내려가면 돌파도 패스도 못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아니 경기 출장을 못해서 감각이 떨어져서일까? 하지만 드문드문 나와서 보여주는 그 모습이 활발하게 날아다니는 이천수와 오버랩 되면서 씁쓸함을 더욱 깊게 안겨주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 3. 경기가 시작되었다. 일진일퇴. 전반 초중반 양팀은 팽팽하게 맞섰다. 포항이 좀 더 미들에서 만들어 나가고 중원 압박을 시도했다면 울산은 이천수를 활용한 뒷공간을 노리는 플레이가 일품이었다. 이 경기를 끝끝내 다 보면서 느낀 감상을 미리 말해보자. 이천수는 일품이었다.

.. 무엇보다도 나를 감탄 시킨 것은 다른 때보다 한발 더 빨라진 듯한 스피드. 분명히 같은 위치에서 달리기 시작했는데 25m쯤 지나다보면 사람 한명 키 만큼 차이가 벌어져버리는 것은 경악에 가까웠다. 게다가 공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투지. 신화용의 선방이 없었다면 울고가는 것은 포항이 될 지도 몰랐다.

.. 경기 전체적으로는 내용이 계속 비슷했지만 중간중간 양팀의 돌파 능력이나 뒷공간을 뚫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포항 팬으로서 기량이 점점 늘고 있는 오승범의 돌파 장면은 박원재의 부상 공백시에 오승범의 투입이 왜 이루어지는지 충분한 이유를 제공했다.

.. 하지만 하나의 아쉬움이라면 3-1-4-2라는 평소보다 공격적인 전술을 들고나온 포항임에도 불구하고 중반 이후 김기동의 활약이 줄어들고 따바레즈의 패스를 받아줄 이광재의 움직임이 아쉬웠으며 최태욱의 골결정력이 아쉬웠다. 그랬다. 이번 경기 역시 미들에서는 그럭저럭 80점 정도를 줄 수 있을만큼 활약을 했지만 공격진이 결정을 지어내지 못하는 아쉬움.

.. 울산 역시 이천수와 알미르 둘의 활약이 돋보였지만 번번히 포항 수비의 타이트한 압박에 막히고 신화용의 선방에 막혔다. 게다가 중원에서는 오장은이 살짝 부활의 기미를 보였지만 단지 그것 뿐. 후반 중반의 노마크 상황에서의 크로스는 내 입에서 '20억짜리의 패스(풉!)'이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 정도였다.


.. 4. 후반 시작해서 오승범의 힘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이자 김광석이 교체 투입됐고 이광재의 스피드가 느려지자 고기구가 나왔다. 울산은 수비를 뚫지 못하는 양동현과 중원에서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던 오장은을 대신해 우성룡과 정경호가 투입되었다. 하지만 정경호는 들어오자마자 경고를 받아 내어 주위에서의 탄식을 자아냈다.

.. 여담이지만 e석 1층에서 봤는데 거기에 나 말고 어떤 아저씨가 포항 팬인지 경기 내내 감독 모드로 소리를 질러내서 앞에서 쿡쿡 대면서 웃고 있었다. 참고로 울산도 e석 분위기는 홈편향인데 주위 사람들 전부 어이 없어하는 분위기. 경기 우리가 이겼으면 아마 그 아저씨랑 지대로 싸움 붙지 않았을까?

.. 경기 자체가 아무리 재밌어도 골이 나지 않으면 아쉬운 법. 체력이 떨어진 황지수를 대신해 미워 마지 않는 김윤식이 투입되었고, 울산도 부상당한 이종민 대신 김영삼이 투입되었다. 그러다가 이날 경기의 하이라이트. 가장 숨막히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 후반 막판. 울산의 공격을 중원에서 차단한 포항은 최전방의 최태욱에게 단숨에 찔러주었다. 오프사이드가 아니었기에 혹시나 오심이 있지 않을까 부심을 쳐다보았는데 경기 속행. 다시 고개를 돌리니 단숨에 김영광과의 1:1 찬스가 연출. 주위 울산 팬들은 '어어어'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나도모르게 '으아아아아'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최태욱이 골을 향해 슛을 하는 시점에 그 뒤를 고기구가 뛰어들어갔다. 최태욱이 슛을 했지만 아쉽게도 김영광에게 막혔다. 그리고 그 볼이 고기구에게 연결되었다. 침착하게 김영광을 고기구가 제쳤다. 나는 골을 확신했다. 주위 울산팬들은 절망스러운 탄식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고기구가 슛을 했다. 그러나 그 볼은 어이 없이 골대를 맞고 튀어나왔다.

.. '으아아아악!' 하는 괴성을 지를 수밖에. 주위의 울산팬들은 다들 안도의 한숨과 조롱의 웃음이 터져나왔다. 뒷자리에서 감독질 하던 아저씨는 그 뒤로 목이 쉬었는지 한동안 벌호우 모드.


.. 5. 그렇게 경기는 끝이 났다. 여전히 포항의 골 결정력은 안습. 설마 골키퍼까지 제치고 골을 못 넣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울산은 이천수 빠지면 대체 경기 어떻게 해먹을지 궁금할 정도. 이천수는 이날 울산 공격의 50%였다. 알미르는 두두처럼 여름남자 분위기가 풁풀. 전반에 좀 벌호우 타나 하더니 전반 중반부터 후반 중반까지는 몸이 데워졌는지 꽤나 펄펄 나는 모습.

.. 오승범 돌파력이 엄청 늘었다. 패스 질을 좀 더 높여야 할 것 같지만 사이드도 꽤나 괜찮아진 느낌. 고기구는 이번 골을 넣었으면 분위기 살아날 것 같지만 이번에도 못 넣어서 어찌 될지는 모르겠다. 이날 포항 마지막은 김윤식의 재발견 스러운 느낌. 이천수가 지쳤다 쳐도 돌파를 시도하는 이천수를 막아내고 공격으로 연결하는 모습은 내가 그렇게 비판하던 황지수 어느샌가 완소모드로 변한것 처럼 그 역시 완소남으로 변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하게 만들었다.


.. 6. 어쨌거나 저쨌거나 13R이 끝났고 순위는 7위. 아직 리그는 끝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리그 끝날 때 6위안에 들 자신은 여전히 있다. 이번 여름 휴식기 때 괜찮은 외국인 선수나 좀 데려왔으면... 대체 따바레즈 이후에 쓸만한 용병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 Ps. 그나저나 천수야 제발 좀 크리그를 떠나라 ㄲㄲㄲ

.. Words of Yu-Tak Kim, the elemental of the wind.
신고
Posted by elofw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