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축구와 연을 맺은 건 우리 또래 애들이 그러하듯이 동네(골목) 축구 부터였다. 당시엔 꼬맹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풍조도 없었고, 애들의 소일거리는 딱지치기나 구슬치기, 자치기, 아니면 골목에서 동네 애들끼리 축구 공 갖고 공차기. 뭐 이런 거였다.

.. 그러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그 학교가 제주도 초등학교 중에서는 축구로 명문인 학교(최진철, 신병호, 오승범, 심영성 등 배출)라 자연스레 축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애들이 주로 하고 노는 놀이는 당연히 축구 였다.

.. 나야 당시에는 키도 작고 운동 능력도 매우 떨어져서 (달리기 같은 거 매일 꼴등, 운동신경 제로) 수비만 봤고 그마저 제대로 못 하는 그런 녀석이었지만 4학년 때부터 백호기 대회 응원에 강제로 동원되는지라 축구부 경기는 여러번 볼 기회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다른 종목 보다는 축구라는 경기에 보다 많은 애정을 가져가게 됐다.

..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며 축구부가 없는 학교로 진학한 탓에 축구랑 좀 멀어지나 했지만 당시부터 미쳐있던 게임 덕에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부터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아, 물론 스쿼드나 경기 내용 같은 건 기억 못한다. 다만 엄청나게 빠른 선수들이 주 였다는 것 밖에는.

.. 내가 보다 본격적으로 기억하는 건 94년 미국 월드컵 부터였다. 중3 시절. 축구에 대한 것은 살피 잊어가던 나에게 미국 월드컵은 사라져가던 축구에 대한 애정을 다시금 지펴주는 그런 녀석이었다. 특히나 93년 도하의 기적이라는 극적인 진출과정을 거친 한국 대표팀은 H-H에 고정운, 서정원 등 이제는 클래식 스타에 이름을 올릴만한 그런 선수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내 눈을 사로 잡았던 것은 황선홍.

.. 황선홍에게 골이 가면 무언가 하나 해줄것만 같은 느낌이 있었다. 전술이나 포메이션, 개인 능력 같은 것을 보는 눈은 없었지만 그에겐 무언가의 기대감이 있었다.

.. 스페인전을 2:2로 비기고 볼리비아전. 황선홍은 무수히 많은 찬스를 잡아냈지만 골문 앞에서 마저 하늘로 차 올려버리는 등 수많은 실수를 하고 결국 0:0으로 비기고 만다. 그리고 나는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든 황선홍에 대한 기대가 증오로 바뀌었다. 단 한골만이라도 집어넣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을 단 한 골. 그 단 한골이 안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황선홍은 나의 마음 속에서 역적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무언가 껄끄러운 느낌. 단순히 그를 신나게 욕하기에는 마음 한구석에서 '그게 아니야'라고 속삭이는 듯한 느낌.

.. 그 정체를 깨달은 것은 96년이었다. 정규리그 13경기 출장 10골, 컵대회 5경기 출장 3골. 18경기 13골이라는 골폭풍을 몰아치는 그를 보고서야 나는 94년에 느꼈던 그 껄끄러움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것은 바로 황선홍이 아니라면 찬스 상황 자체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위치선정, 그의 순발력, 그의 시야, 그의 기술. 이런 것들이 합쳐져서 그는 골 찬스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지, 당시 대표팀의 다른 선수들이 그런 골 찬스 자체를 만들어 내기 힘들었을 것이란 것을 나는 비로소야 깨달았다.

.. 결국 96년을 기점으로 나는 황선홍에 대한 나의 악감정을 해소했고,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던, 그리고 사람들이 그에 대해 내뱉던 그 악담들이 그를 얼마나 힘들게 했을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한 선수의 팬이 되는 것을 접었다.

.. 그리고 97년 고3시절, 형에게 고등학생 중에 엄청나게 잘하는 녀석이 있다고. 10년 넘게 스트라이커 걱정 안하고 살아도 될 놈이 있다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역시 같은 고3이라고. 포항에 있는 녀석인데 한 번 뛰는 걸 봤는데 그야말로 물건이라고. 그 때 내 귀를 스치고 간 이름이 있었다. 바로 '이동국' 이었다.

.. 98년 월드컵 네덜란드에게 처절하게 깨지던 그 상황에서 이동국의 충격적인 슈팅은 나의 눈을 빼았았다. '저녀석 정말 물건이겠다' 라는 느낌.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형의 말이 떠올랐다. 벌써 저정도의 능력을 보여주다니 다음 월드컵이면 붙박이 주전에 에이스 스트라이커겠다고.

.. 하지만 개인적인 문제로 축구에 관심이 떨어진채 시간이 흘러 흘러 나는 군대에 들어갔고, 리그고 대표팀이고 제대로 봐오지도 않았던 탓에 2002년 그의 탈락은 내게 있어서 어느덧 당연한 일이 되어 있었다. 애초에 팬도 아니었고 그의 성공과 부침을 어깨너머나마 접하다 보니 나에게도 '이동국=게으름'이란 공식이 자리 잡혀 있었다. 그가 소속팀에서 어떤 전술로 뛰는지도, 그의 혹사가 어느 정도인지도 그런건 알지도 못한채로 그저 그는 게으른 플레이어였고, 고종수의 침몰과 함께 '게으른 천재'의 부침이라고 해석했다. 조그만 안타까움을 남긴채. '저 녀석이 계속 성장했으면 엄청났을텐데...' 이런 안타까움.

.. 그리고 월드컵 이후 여전히 국대 경기 위주로 관전하고 K리그는 외면했던 나였지만 이동국의 움직임이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이 읽혔다. 과거에 문전 앞에 박혀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하염 없이 사이드로 빠지고 중앙까지 내려오고, 되려 골을 넣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골 하나만은 책임지던 녀석이 골을 넣지 못하고 있었다.

.. 퍼뜩 떠올랐다. 나는 또 알게 모르게 황선홍 때와 같은 실수를 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장점이 완전히 죽어버리고 자기와 맞지 않는 포지션으로 이동을 계속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다. 상무에 입대하고서 윙포워드를 뛰고 있다는 소식에는 안타까움밖에 없었다.

..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04년 7월. 본프레레 부임 후 재 등장한 그는 내가 마지막으로 눈에 넣었던 시절의 그와 플레이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색함은 여전하지만 골게터로서의 자신과 팀플레이어의 자신을 융화시키고 있단 느낌. 그는 더이상 느리지도 게으르지도 않았다.

.. 하지만 내가 군대 다녀온 사이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활성화 된 인터넷 여론은 여전히 그를 과거 황선홍 마녀사냥하듯이 물어 뜯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가장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질 않지만 아시안컵 정도였을 것이다. 당시 자취방에 TV가 없어서 근처 술집에 가서 술만 시켜먹고 TV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주위에서 이동국을 질펀하게 욕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 내용인 즉슨 과거 대다수의 사람들이 황선홍을 욕하던 소리와 별반 다를 것도 없었으며, 이동국을 욕하는 포털의 악플들과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이동국이 잘 할 때는 침묵하고, 혹은 불안해 하고, 실수라도 하나 하면 '이래서 저 놈은 안돼!' 라고 소리치고, 골을 넣으니 재수하난 죽인다고 조롱하고.

.. 퍼뜩 깨달았다. 내 모습이 저랬던가. 아무것도 모른채로 단지 분풀이 거리로 쓰던 내 모습이 저랬던가. 지금 앞에 뛰는 선수의 플레이를 자세히 보지도 않고 그냥 내 기분 내키는 대로 내질렀던가.

.. 씁쓸함과 분노가 한꺼번에 찾아왔다. 내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기에 저렇게 욕할 수가 있었나. 그들을 위해 기도 한번 해본적 없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들에게 비난을 할 수가 있었나. 과연 나는 그들에게 좀 더 나아지라는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들에게 힐난을 했던가. 아니었다. 나는 단지 순간의 기분풀이와 희생양이 필요했을 뿐이다. 가장 눈에 띄는 포지션의 가장 눈에 띄는 실책을 부풀려서 말이다.

.. 그 이후에 K리그 포항 스틸러스의 서포터가 되면서 부터 선수들의 일상적인 플레이를 눈에 접하고서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평소에 선수들이 어떻게 뛰는지. 선수들의 성향이 어떤지. 단순히 여론에서 물어다 주던 편향적인 정보가 아니라 내 눈으로 확인한 선수들의 모습. 거기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단지 애정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달랐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었나 하는 허탈감마저 느낄 정도로.

.. 그래서 보고 있다. 좀 더 공부도 하고 있다. 알고 있는 만큼 보이는 것.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좀 더 알아야 좀 더 잘 보일테니까. 적어도 나 혼자만이라도 비판아닌 비난을 해선 안되지 않는가. 선수들이 나를 위한 안주감도 아닌데.

.. Words of Yu-Tak Kim, the elemental of the wind.
Posted by elof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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